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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웃는 자는 누구인가

세뇌의 기술 열한 번째 이야기

by 애들 빙자 여행러

나는 산책을 좋아한다


몇 년 전에는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동네를 탐방하는 것을 즐겼다. 서울에 살지만 자신에게 익숙하고 안정적인 동네를 벗어나면 모두가 여행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내 또는 붐비는 지역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 다른 느낌 또는 예전의 향수를 느낄 수도 있는 거다.


시장을 다니는 것도 재미있었다. 어렸을 적 시장 근처에 살았어서 엄마는 저녁때가 되면 시장에서 저녁 찬거리를 사다가 밥을 해주셨다. 시장의 먹거리도 잊을 수 없지. 그 옛날의 시장, 초등 아니 국민학교 앞 문방구 등. 서울은 또 하나의 역사이자 관광지다.


산책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문명의 발달과 나의 나이 듦에 따라 무작정 걷는 것이 힘겨운 나이가 됐다. 예전엔 아무리 걸어도 힘들지 않았는데 요즘엔 가끔 무리가 온다. 얼마 전부터는 귀에 아이팟을 꼽고 유튜브를 들으며 다니다가 언제부터인가 오디오북을 듣기 시작했다. 회사 업무가 미디어부서에 있을 때는 난독증에 걸렸는지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가 부서가 바뀌고 나서 가벼운 책은 읽게 되었고 최근에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러면서 월정액 도서서비스에 가입되게 되었고. 책 얘기로 빠지면 안 되는데. 거기서 오디오북을 발견한 것이다.


산책하면서 오디오북을 듣는 건 나름 운치 있다. AI나 성우가 책 한 권을 읽어주는데 그때 그 소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정말 짬을 내서 책을 읽는 건 뭔가 인생에 도움을 얻고자 정보와 호기심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경제경영, 건강 같은 정보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접하게 되면서 신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일종의 오디오 드라마였다.


놀라운 오디오북의 발견


해당 작가의 대표작은 <용의자 X의 헌신>이다. 한중일 3개국에서 모두 영화로 리메이크되었고 3개를 다 보기도 했다. 이때 나는 중국 리메이크도 매우 재미있게 보았고 중국의 제작 수준에 놀라기도 한 것 같았다. 오디오북에서 성우들이 모두 역할극을 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7~8시간을 집중하기도 했다. 특히나 해당 작가의 많은 작품이 시리즈로 올라와 있었는데 이 자리를 빌려 ‘윌라’ 담당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용의자 X의 헌신>도 뛰어난 작품이지만 이 이야기의 시리즈인 ‘갈릴레오’ 시리즈에는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이 시리즈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게 일정하다. 특히나 본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유가와’ 물리학 박사는 모든 미궁의 사건을 물리학적 추리와 이론을 해결한다.


산책은 나와 그의 만남이었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 걷곤 했다.


유가와 교수는 항상 조력자였지만 <금단의 마술>이란 작품에선 그가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절정의 순간에 경찰들에 둘러 쌓여 범인과 대치 중인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그는 크게 웃었다. 유머러스하기까지 했다.


난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내가 만약 그런 순간이라면 나는 몸이 얼어붙고 식은땀을 흘렸을 텐데. 내 기억 속 유가와 교수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을 것 같다.


“나도 두려웠어. 그런데 그 상황이 너무 재미있고 의외의 상황이더라고. 그를 믿었다기보다는 어쩌면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었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지. 그럼에도 그 기발하고 한계를 극복한 그 과정을 생각하니 유쾌해진 거지. 바로 그때 그 친구와 함께 더 큰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난 거야. 갑자기 웃음이 나더라고”


낭떠러지 위에 선 사람이 웃을 수 있을까. 최악의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있는 사람은 웃을 수 있을까. 그 위에서 웃을 수 있는 상상력과 여유. 그것이 그를 자유롭게 날 수 있게 만든 건 아닌지. 사람이 마지막에 웃을 수 있는 건 담력의 문제가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 한 줄기 빛과 낭만을 찾아 낼 수 있는 세뇌의 기술은 아닐지.


어떤 순간에도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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