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자신의 비참한 현재 상황을
순식간에 깨부수고 싶다면,
힘들었던 과거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싶다면,
자신이 보고, 듣는 말의 내용을 바꿔라.
-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은 ‘힘들었던 과거에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싶다면, 자신이 보고, 듣는 말의 내용을 바’꾸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보고 듣는 말의 내용을 바꿀 수 있을까요?
10여 년 전 일입니다. 저녁 시간, 아내와 저는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갔고 아이들 셋만 집에 있었습니다.
아이들 셋이 침대에서 꼿꼿하게 선 채로 뒤로 넘어지는 놀이를 하다가, 5살 막내가 침대 모서리에 뒤통수를 쾅 하고 찍고 말았습니다. 머리가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데, 집에 전화기도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큰딸이 침착하게 수건으로 막내의 머리를 막았지만, 피가 계속해서 흘렀습니다. 겁에 질린 막내가 “누나, 나 죽는 거 아니야?”라고 했을 때 아이들의 공포가 극에 달해서 다 같이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결국 큰딸이 이웃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고, 이웃집에서 아내와 119에 연락을 해줬습니다. 우리는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고,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금세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때맞춰 도착한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다행히도 머리가 5cm 정도 찢어진 것 외에는 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치료를 받고 다섯 가족이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차 안의 공기가 무척 무거웠습니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만 두고 집을 비웠다는 미안함에, 아이들은 채 가시지 않은 두려움과 놀라움에,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라고 툭하고 말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제 말을 받았습니다.
“머리가 찢어지기만 하고, 다른 이상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옆집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어서 참 다행이야.
제가 말을 받았습니다.
“그래, 옆집에 사람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또 제가 큰딸에게 말을 했습니다.
“어떻게 옆집에 찾아갈 생각을 했어? 그런 생각을 해내서 참 다행이야.”
큰딸이 살며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게 그런 생각을 해서 다행이야. 혼자였으면 정말 무서웠을 텐데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야.”
둘째가 말했습니다.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만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막내가 말했습니다.
“누나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갑자기 차 안의 분위기 확 바뀌어, 너도나도 다행인 이유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아빠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다행이야.”
“우리가 셋이라서 다행이야.”
“침대 모서리가 쇠가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져서 다행이야.”
“119가 빨리 와줘서 다행이야.”
“병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다행이야.”
“잘 치료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살아있어 다행이야.”
“지금 이렇게 같이 차를 타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렇게 ‘다행이다 놀이’를 하다 보니 어느새 차 안에는 밝고 따뜻한 공기가 가득해졌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의 얼굴이 편안하고 밝아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밤 모두 편안하게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다행이야’라는 말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감사할 점에 집중하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행이야’라는 한마디 말에 어두운 무채색 같던 세상이 순식간에 밝고 환하게 변하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같은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통은 현실에 저항할 때 생겨납니다. ‘이렇게 되어선 안 돼.’라는 생각은 현실을 거부하고 저항하게 만듭니다.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1)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미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과거를 바꾸려 저항하는 대신, 그 상황을 우선 받아들입니다.
2) 현재에 머물며 감사에 집중한다.
미래의 걱정이나 과거의 후회에서 벗어나 현재에 집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점이 있으며, 지금 이 순간이 괜찮다고 인정합니다.
이 태도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미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평화와 감사할 점을 찾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보고 듣는 말의 내용을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군가의 비난이나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저항하거나 방어하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 저렇게 기분 나쁘게 말하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너는 그렇게 잘 났어?’
이런 식으로요. 그러나 이렇게 저항하는 순간, 그 말은 우리를 더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저항 자체가 고통을 키우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같은 말을 듣더라도, 그 말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비난한다는 생각이 들 때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불안함이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나의 세상이 결정됩니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어도 다른 렌즈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습해 봅니다.
1) 멈추고 질문하기
비난하는 말을 들었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전에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정말 나를 공격하는 것일까?’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2) 말을 뒤집어 보기
습관적인 반응을 하지 말고 다른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말을 나에게 좋은 방향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저항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듣는다면 그 말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해지고, 때로는 비난 속에 숨은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듣는 방식은 언제나 내 선택입니다. 상대방의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지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나를 해칠 힘은 없습니다.
비난의 말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나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내가 그 말을 해석하는 방식을 바꾸면, 나는 감정적으로 더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말이 무엇이든, 언제나 나는 나의 평화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나의 평화를 선택합니다.
새세상을 보려거든
보고돋는 말바꿔야
어떡하면 자주듣는
말바꿀수 있을까요
있는현실 거부하고
저항할때 고통겪네
다행이다 한마디에
공포불안 사라지듯
현실수용 감사집중
평화찾는 연습하네
같은말을 듣더라도
듣는방식 선택가능
비난하는 말을해도
듣는방식 선택가능
같은세상 살더라도
다른렌즈 낄수있네
가시돋힌 말이라도
내가허락 않는다면
나를해칠 힘없으며
나의성장 도구되니
상대말이 뭐라하든
나의평화 선택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