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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Aug 13. 2022

그는 공사장에서 걸어 나왔다.

첫 사고

차주는 남자였고 다른 곳도 아닌 공사장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온몸이 굳어버리는 듯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요? 제가 긁어버린 차의 차주 이야기예요. 그날의 기분을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처럼 써보았어요. 단 한 문장이지만 괜스레 무서운 느낌이 들지 않나요? 전 진짜 무서웠어요. 그날의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아마 겨울이었을 거예요. 같은 동네(시골)에서 일하던 남편이 집 근처로 발령이 나면서 제가 혼자 운전해서 장거리 출퇴근을 해야 할 날이 채 100일이 남지 않은 시점이었죠. 남편은 연습을 해봐야 한다면서 출근 운전대를 저에게 넘겼어요. 저 또한 당장 두어 달 뒤면 혼자 운전해야 하는데 남편이 옆에 있을 때 제대로 배워봐야겠다 싶어서 순순히 알았다고 했고요.      


그런데 그렇게 연습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저녁. 부부싸움이 일어났어요. 사실 황당하게도 지금은 그때 왜 싸웠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나요. 시간이 흐르면 다 잊히고, 부질없다고 느낄 것을 매번 남편과 싸우는 바로 그 순간에는 왜 내일이 없을 것처럼 감정의 날을 세우게 되는 걸까요? 새삼 반성하게 됩니다.      


여하튼 그날 저녁에도 엄청난 감정싸움을 벌였고, 그로 인해 쌓인 화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도 풀리지 않았어요. 마음 같아서는 혼자 차를 쌩 끌고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기에 저희 둘은 아무 말도 없이 차에 올라탔어요. 출근길을 완전히 외우지 못한 상태였지만 남편에게 물어보자니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말 그대로 사면초가였어요. 하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며 자신 있는 척 출발했어요. 하지만 곧 멘붕이 왔죠. 길이 기억이 났다 안 났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결국 저는 이상한 길로 들어서고 말았어요.     


"어디가?"     


당황한 남편이 물었지만 이미 저도 느끼고 있었기에 너무 창피해서 대꾸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순간.     

찌익     


"..."     


그때까지만 해도 나름 무사고 운전자였던 저도 한 번에 딱 알겠더군요. 제가 남의 차를 긁었다는 사실을. 하필 잘못 들어선 길이 양옆으로 평행주차가 빼곡히 되어있던 골목길이었어요. 그리고 운전이 서툴렀던 저는 요리조리 피하면서 중앙선을 넘어서지 않으려고 용을 쓰다 다른 차에 비해 월등하게 덩치가 커서 툭 튀어나와 있던 SUV차를 긁어버린 거죠. 급히 정차를 하고 남편과 함께 내렸어요. 다행히(?) 많이 긁은 것은 아니고 펼쳐져있던 상대차의 사이드 미러를 제 차가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 사이드미러가 접히면서 살짝 긁혔던 거예요. 물론 이건 제 관점이고 차주의 입장을 달랐겠죠. 아주 미세하게라도 누가 내 차를 긁었다고 하면 누가 기분이 좋겠어요.     


너무 당황스러웠어요. 여전히 남편과 말도 하기 싫었지만 슬쩍 쳐다보니 남편은 이미 상대 차주의 전화번호를 찾아 차주에게 전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사무실에 전화를 했어요. 지금 사고를 냈고 조금 늦을 것 같다고. 그러고 나서 다시 남편을 보니 상대 차의 사이드미러를 유심히 보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바로 그때.      

그가 나타났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신축 아파트 공사가 한참 진행되던 곳의 맞은편이었어요. 그리고 상대 차주는 그 공사장에서 걸어 나오셨어요.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에 덜컥 겁이 났어요. 아마 남편이 없었으면 손을 파르르 떨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와 다르게 남편은 역시 차분하게 차주분께 다가가 상황설명을 하더라고요. 어제저녁부터 계속 미웠던 남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찌나 듬직하게 느껴지던지요. 싸울 때마다 남의 편 남의 편 해도 사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내편이라는 사실이 새삼 너무 고마웠어요.      


여자 처자 남편의 설명이 끝나고 차주분은 저를 한번 쓱 보시더니 자신의 차로 다가가 사이드미러를 살펴보셨어요. 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보시더니 남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시더군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아무 말 없는 그분을 보며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어요.     


"정말 죄송해요."     

(저도 뒤에서 앵무새처럼 따라 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그때 이미 운전자분은 제가 운전했다는 걸 알아차리신 듯했어요.)     


"..."     


"정비소 가서 고치시고 연락 주시면 보험 처리할게요."     

(앵무새가 된 듯 저는 또 말씀드렸어요. 정말 죄송해요. ㅜㅜ)     


"... 이거 뭐 사포로 문질러보지 뭐"     


응? 이게 지금 무슨 말이지? 생초보 운전인 저는 또다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남편은 달랐어요.     


"아니에요. 고치시고 연락 주세요."     


"문질러보고 안되면 뭐.."     


"제 번호 알려드릴게요."     


남편이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나니 상대 차주분께서는 쿨하게 뒤돌아 공사장으로 돌아가셨어요. 한결같이 차분하게 대쳐 해준 남편이 고마웠지만 아직은 냉전 상태였기에 새침하게 조수석에 탔어요. 그러자 잠시 어이없어하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앉더군요.      


하루 종일 일에 온전히 집중이 되지 않았어요. 상대 차주가 연락을 했는지 안 했는지 너무 궁금해서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꼼지락꼼지락 댔지만 남편과 화해를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물어보지 못했어요. 퇴근 후에야 연락이 없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죠.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저씨는 연락이 없으셨어요. 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이 사건이 서서히 잊히고 있을 때쯤 어느 주말 아침에 남편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제 차는 남편이 운전하다가 제가 운전을 하게 된 거라 아직까지도 남편 번호가 앞유리에 붙어있어요. 전화를 끊은 남편이 갑자기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무슨 일이야?"     


"누가 당신 차를 긁었다는데?"     


"...?"     


당황한 저를 두고 남편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왔죠.      


"많이 긁었어?"     


"사진 봐봐"     


언뜻 봐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유심히 보니 상대 차가 긁고 지나간 자리가 보였어요.      


"어떡할까?"     


"..?"     


"보험 처리할 건지 안 할 건지 결정하라고"     


"음.."     


고민되었어요. 그동안 제가 남의 차를 긁거나 박을까 봐 노심초사는 했어도 누가 제 차를 긁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그때, 공사장에서 나왔던 차주분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퇴근 후 남편에게 말했죠.      


"그냥 넘어가지 뭐"     


"안 그래도 나도 그러자고 할 참이었어"     


그렇게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요. 사실 몰랐으면 모를까 지금도 그 차가 긁은 자리는 제 눈에 선명하게 보여요. 하지만 괜찮아요. 제가 받은 배려를 저도 남에게 베풀었으니까요. 남편이 나가는 바람에 얼굴은 못 뵈었지만 제 차를 긁은 그때 그분도 제가 공사장 아저씨 덕분에 느낀 것처럼 아직 세상은 그렇게 각박하지만은 않다고 느끼셨을까요?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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