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처럼 터지고, 벚꽃처럼 피어

존재의 조건과 이유

by 서용훈
“에헤이, 또 넘쳤네 이거.”


운전 길에 잠을 쫓을 요량으로 군것질용 과자 몇 봉지와 함께 사둔 탄산수를 열었는데, 그새 탄산들이 흥분하였는지 오만데 자기주장을 하고 나섰다. 치익~


탄산이 청량감을 유지하려 음료에 머물기 위해서는 적절한 온도와 압력적 조건이 있는 모양이다.


요사이 나보다 똘똘하다고 소문이 난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물어보았다.


나름 명쾌하다!

⓵ 탄산수가 흔들리면서 기포핵 역할을 하는 작은 입자들이 떠오르게 됨.
⓶ 이렇게 생겨난 기포핵이 음료에 녹아있는 이산화탄소를 밖으로 꺼내는 발판 역할을 함.
⓷ 거기에 고압이 형성되어 있던 병이 뚜껑이 열림에 따라서 갑작스레 압력이 낮아지면 용해되어 있는 이산화탄소의 기화가 촉진됨. 치익~


이러저러한 과학적 과정과 이유에 따라서 내 바지와 카시트는 물론, 기분까지 축축하게 적셔버렸다는 결론이다.

단박에 잠이 화들짝 깨었는데, 효과가 카페인의 몇 배는 된다든지, 그런 내용은 알려주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인공지능 친구는 내 기분에는 별 관심이 없고, 추론한 정보를 연신 뱉어내기 바쁘다.

“탄산수 보관의 최적 온도는 섭씨 0도에서 4도가 좋을 것이고, 섭씨 20도가 넘어가면 끓어넘칠 가능성이 높아지며, 내부 압력은 대기압보다 20배가량 높을 것인데… ….”

적당히 해라, 이 친구야.




천지에 벚꽃이 화사하다. 봄이다. 지역마다 창의성은 별로 없구나. 하고 잠깐 생각했다가, 그래도 어여쁜 꽃나무들의 군집을 바라본다.

네, 진해 여좌천 맞습니다.


분명히 지난 주만 하더라도 앙상한 가지를 달고 있는 모습이 심란하기까지 하였다.

며칠 동안 비가 촐촐히 내리고, 남풍이 여러 차례 부는가 싶더니, 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벚나무 가지가지 마다 꽃무더기들이 탐스럽게 자리 잡는다.


인공지능 선생 왈,

⓵ 온도가 섭씨 10에서 15도 이상으로 올라야 함.
⓶ 일조량이 충분해야 하며, 나무 자체의 건강이 중요함.
⓷ 6주 이상의 추위가 전제되어야 함.

혹독한 추위가 선행해야 한다는 점은 새삼 놀라운 조건이다.


벚꽃터널을 멋드러지게 드라이브하며,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몇 마디 더 거든다.

“벚꽃은 잎보다 먼저 피고요, 개화시기는 평균기온이 섭씨 13도 정도가 지속되는 날 수를 통해 추론 가능하고요… ….”

이제 그만해, 친구야.




사람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것이든, 대자연의 섭리로 빚어진 자연물이든, 조건과 원리와 상황이 필요한 법이다.

다 저마다의 때와 방식과 이유가 있다. 이 구성의 원리 중 하나라도 불비하거나, 지속성이 다하게 되면, 이내 '그 것'은 성립하지 않거나 성격이 바뀌게 된다.




나는 거의 매해 일자리와 삶의 공간이 바뀐다. 어떤 해에는 무척 흥미진진하고 매사가 즐겁고 도전의식에 넘쳐난다. 또 다른 어떤 해에는 적잖이 곤욕스럽고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아온 저마다의 삶이 모종의 원리와 이유에 의하여 한 공간이 모여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좋건 싫건, 연말이 되면 다시 새로운 공간과 일들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그래서 헤어짐의 순간에는, 좋았던 인연들과의 이별은 애통하게도 슬프고, 고약했던 인연들과의 이별은 더러 후련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여러 해가 지나고서 이렇게 탄산수에 젖어버린 차림으로 벚꽃길을 드라이브하며 반추해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의 고통스러움이 과연 그저 고통과 상처로만 남았는가. 내가 조금 더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은 아니었던가.



모질고 꼼꼼한 상관과 일을 해야 해서 매사가 살얼음판이고 괴로웠다면, 그것은 내게는 세찰할 만큼의 시야가 없었던 탓에 자연스레 성장 시킬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동료와 마주하게 되었다면, '다양하고도 복잡한 사람들이 사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이라는 놀라운 통찰을 마주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일들이 쉴 새 없이 몰아쳐 대던 것은, 다양한 상황 아래에서도 빛을 발하는 경험과 연륜을 갖추게끔 하려는 인사권자의 배려일 것이다.


이 모든 시련이 내게 오는 것은, 탄산수 통에 터질듯한 고압을 주입하는 일과 벚나무에 몇 주간 주어지는 매서운 추위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모두 ‘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한 일종의 조건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남은 물음은 하나이다.


이렇게 공들여 키운 ‘나’는 어디에 쓰임이 있으려는가. ‘나’는 또 누군가의 조건이고 원리이고 환경이 될 것인가.


인공지능 친구는, 저에게도 없는 자아를 고민하느라, 오늘도 환상통에 시달리겠구나. ⚓️


인공지능이 그려준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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