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_86. 지구함 항해일지

순항훈련 펜탈로지 네 번째 이야기.

by 서용훈
쾅! 구구궁!


평온이란 것은 숫제 수평선 마냥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고 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내리는 한 줄기 빛.
동전만 한 크기로, 성스럽게도 반짝이는 그곳의 바다는 분명 융단과도 같았다.

수평선 너머 평온

저 멀리가 여기로 다가와 내게 보여준 것은, 여지없이 펼쳐진 생지옥이다.

북해가 중력과 더불어 거대한 배를 지구에 던지는 중이고, 나는 그 안에서 분투한다.

집채만 한 파도. 폭풍 '시아란'.

* 시아란(Ciaran) : 2023년 지중해 서부와 북해를 강타한 폭풍




"제법 파고는 높을 것 같습니다만, 항해 일정을 늦출 정도는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탁월한 분석이었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의 기항 일정은 요약하건대, '감사'와 '따뜻함'이었다.

과거 광부와 간호사로서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하여 국가 간 교역이라는 큰 흐름에 헌신하신 분들. 그분들과의 만남이 여러 번 이뤄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생경한 환경들을 온몸으로 버티어내며 살아온 연륜이 맞잡은 손 끝에,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느껴졌다.

독일 한인회 여러분들과의 오찬


"내 고향 마산은 잘 있는가." 하시던 대선배님의 간절한 물음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물질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지만, 오래전 떠나온 '고향땅'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아련할 뿐이었고, 이젠 건강도 예전 같지 않아 그 체감상의 거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무엇이었던 것 같다.


따뜻한 환대와 아쉬움 가득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음 항로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날씨를 핑계로 하루 이틀 늦어지면, 앞으로 남은 항해들을 주어진 기간 안에 완주하기란 장담하기 힘든 일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감수할 만한 수준이면 강행하는 것이 옳지. 폭풍의 진로를 우회하는 항로를 잘 짜봅시다. 우린 내일 계획 대로 출항한다."



독일 함부르크 도선사님과

영화에서나 보던 유럽식 마을이 강 양편으로 드문드문 보인다.

말갛게 밝아오는 아침, 함부르크를 출항하는 기분은 무척 상쾌했다. 출항하고서 몇 시간은 쥐 죽은 듯 고요한 바다가 주는 정취에 취하여 잠시 낭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함부르크의 해양박물관에서 봤던 북해의 험한 파도에 대한 그림이 잠깐 생각이 났다. 그림에 대한 설명은 이러하다.

Allart van Everdingen (1621-1675), Vessel and Rowing Boat in a Choppy Sea (출처 : 함부르크 해양박물관 홈페이지)

서유럽과 북유럽 사이에 위치한 북해는 옛부터 거친 바다로 유명했다. 고위도 저기압대에 걸쳐있는 지리적 영향으로 인해서 악기상이 잦고, 그에 따라 항해사들 사이에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특히나 추운 계절에는 멀리 돌더라도 북해만은 피하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긴 수로를 벗어나 얼마쯤 항해했을 때, 그림에서 보았던 겨울의 북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족히 5~6미터에 이르는 집채 만한 파도들이 함을 에워쌌다. 길이 백오십 미터에 육박하는 육중한 군함이 연신 성난 바다에 큰절을 올렸다. 기술이 조금만 더 진보했더라면 배가 읊조렸을 것이다.

"조금만 파고를 낮춰 주십사..."

사진은 늘 덜해보인다.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악기상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함교의 함장석에 앉아, 첩첩 쌓인 해신의 분노를 최대한 부드럽게 타 넘고자 애썼다.

그러나, 눈앞에 자꾸 펼쳐지는 파도의 계곡은, 시시각각 모양과 깊이가 계속 변하며 머리 위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매 순간 5미터씩 하늘로 솟았다가 지구를 향해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게 '흡. 흡.' 하며 염통을 옥죄었고, 식은땀이 몸 여기저기서 흘러내렸다. '두근, 두근' 심장이 귀에서 울리기 시작한다.

빠드드득하며 철 구조물들이 일제히 지르는 비명 소리에 정신이 한층 더 아득해진다.

대자연의 무지막지한 횡포와 겁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군함 내 복잡한 격실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지옥으로 내몰리는 듯 가빠지는 숨 사이로, 두려움이 스멀스멀 나를 잠식하고 있었고, 온갖 책임을 어깨에 떠안고 싸우는 모습이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다.


"와장창!"


흔들리는 장면 너머로 당번병이 뭔가를 들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쟁반에 삶은 감자와 군것질거리들을 담아 들고 오다가 파도에 흔들리는 통에 포크와 머그컵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함장님. 어제부터 식사도 거르고, 한숨도 못 주무셨잖습니까?"

그렇다. 벌써 서른 시간이 넘도록 생사를 넘나드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친구야, 혼자라니?! 외롭다니?!

그제야 마음속 시야가 넓어져 제자리를 다시 찾으며, 잔뜩 움츠러든 어깨가 부끄러워졌다.




배는 어느 한 사람의 용력만으로 전진하게 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들이쳐대는 파도를 뚫고서 먼발치를 바라보며 길을 재촉할 수 있어 야 하고, 어떤 이는 격랑에 쓸려가지 않도록 방향타를 굳건히 잡아 주어야 하며, 또 누군가는 엔진을 돌게 하는 각종 계기와 액체들을 관리해주어야 한다.

그것뿐인가?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잘 임무 할 수 있도록 애써 밥을 짓는 사 람이 있어야 하고, 혹여 폭풍에 뒹굴다가 다치기라도 한 사람이 있다면 정성으로 돌보아 회복을 돕는 이도 있어야 한다. 또, 심신이 지쳐 온 우주에 저혼자라 느끼는 승조원이 있다면 보듬어주고 삶을 헤쳐나가도록 북돋는 이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단 1해리라도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


'한 배를 탄 사람으로서의 자각' 그것이 억척스러운 뱃사람들의 전통이고 자부심이다.

휘몰아치는 폭풍. 흔들리는 배 안에서 각자는 자신만의 싸움을 하며 서로에게 기여하고 있었다.

함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대자연의 힘 앞에 잠시 망연자실하여 놓친 뱃사람의 자부심이, 가슴속 제 위치에 들어앉자,

그제야 메마른 목구멍으로 감자가 넘어간다.

다시 내려준 커피가 리드미컬하게 머그 속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함교 함장석 깊숙이 몸을 밀어 넣으며, 커피를 받아 들고 수평선을 응시한다.

현창 너머 불규칙한 파도의 더미들 사이로 해로가 직선처럼 열린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항로를 왼편으로 조금 튼다. 230도 잡아!"

커피와 머그


힘찬 엔진음을 쏟아내며 나아간다. 포츠머스로. ⚓️


포츠머스 해안가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