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주변 사람들

후원자, 아코 이모부 / 평생의 스승, 장 그르니에

by 에트랑제
디두슈 무라드 거리. 이 곳에서는 카뮈를 비롯한 그의 주변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 - 후원자, 아코 이모부


아직 젊은 축의 여행자들은 또한 그곳의 여자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걸 확인해보기에 가장 적절한 곳은 알제의 미슐레 가에 있는 대학 카페의 테라스다. 물론 4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에 그곳에 가 앉아본다는 조건에서 말이다.
무리를 지은 젊은 여자들이 샌들을 신고 색깔이 눈부신 얇은 천의 옷을 입고 거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억지의 수치심 같은 건 느끼지도 않은 채 그네들의 아름다움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네들은 남들더러 봐달라고 온 것이니까 말이다. (『결혼 · 여름』, 과거가 없는 도시들을 위한 간단한 안내, p.128)




디두슈 무라드 거리 Rue Didouche Mourad (예전 이름은 미슐레 거리 Rue Michelet)는 알제에서 가장 길이가 긴 거리로 카뮈, 그리고 그의 주변사람들과 관련된 장소들이 있다. 그의 대학시절에는 이 거리를 거쳐 대학교에 갔을 것인데, 한참 연극에 빠져있을 때 즐겨 찾던 식당도 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 그의 친형이나 지인 집을 전전하던 시기에도 그는 이 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 거리의 여러 장소 중 가장 먼저 찾고 싶었던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이모부였던 귀스타브 아코 Gustave Acault의 장소. 이모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카뮈는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카뮈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의사는 이모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아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오."


당시 카뮈는 요양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던 그의 어릴 적 집을 떠나 쾌적한 이모부 집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이모부 가게는 디두슈 무라드의 큰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가게는 그때 알제 시에서 가장 좋은 정육점이었고 카뮈는 결핵 환자에게 좋다고 여겨지던 살코기를 충분히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인가. 이모부는 옷과 필요한 책을 사볼 수 있도록 그에게 넉넉한 용돈을 주기까지 했다. 재정적인 후원자 역할까지 한 셈이다.


알제 중심가인 이 거리에는 주차공간이 없어 나는 바로 옆에 위치한 빅토르 위고 가 Rue Voctor Hugo에 차를 세웠다.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대부분의 거리는 현대에 이르러 알제리식 이름으로 변경되었지만, 신기하게도 빅토르 위고 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의 이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느 거리에 19세기의 유명한 일본 문학가 이름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이름이 명명된다고 가정해보면,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용납할 수 있을까.


빅토르 위고 가의 한 건물. 프랑스식 건물들 사이에 이슬람식 건물이 들어앉아있다

2019년의 알제 중심가는 분위기가 제법 무거운데, 디두슈 무라드 거리에 올라서자마자 그 분위기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이 날은 금요일. 오후 모스크 기도시간이 끝나고 예정되어 있는 시위로 인해 중요 장소에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내가 그들 눈에 거슬렸을텐데도 경찰은 나를 보고도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과거 나는 겔마 Guelma라는 지방에서 거리의 풍경을 찍다 경찰서에 불려 간 적이 있었는데, 몇 년만에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다니 놀라울 뿐이다.


시위가 없는 때 이 곳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거리를 따라 조금 내려가서 그의 이모부 가게가 있던 위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과거 화려했을 정육점 대신 그냥 평범한 신발 가게와 사진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디두슈 무라드 거리의 43번지 건물

독서를 즐겼던 이모부 덕분에 카뮈는 자신의 집에서는 절대 접할 수 없었을 여러 서적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 서적 중에는 앙드레 지드 André Gide의 책도 있었다. 카뮈에게 지드는 문학적 영웅이 되는데, 이모부가 지드와의 만남을 주선해준 셈이다. 카뮈는 <앙드레 지드와의 만남>이란 글에서 이모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는 아침나절에 정육점 일에 전념하고 하루의 나머지는 자신의 장서와 신문 읽기, 그리고 이웃 카페에서의 장황한 토론을 하며 보냈다.


그의 이모부가 장황한 토론을 벌였던 이웃 카페는 르네상스 카페 Café La Renaissance를 말하는데, 놀랍게도 이 이름을 가진 카페가 여전히 있었다. 독서뿐 아니라 카페 애호가이기도 했던 이모부가 대화를 나누던 이들 중에는 장 그르니에가 있었을 정도였는데, 이모부는 지식인들과도 교류를 활발히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느 주말 디두슈 무라드 거리를 걸어내려오던 길에 이 곳에 들렸다. 최근에 리노베이션이 된터라 가게 입구부터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이 곳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 질문을 했다.

카페 내부

"이 곳이 오래전부터 있던 르네상스 카페가 맞죠."


"그럼요! 저희 아버지께서 1954년부터 이 곳을 인수하셨는데, 그보다 훨씬 전인 1909년에 이 카페는 만들어졌어요."


카페 주인은 한가한지 아니면 나의 존재가 궁금했는지 서빙 접시를 주방에 놓고와서 내 옆에 앉았다.


오른쪽이 카페 주인이다

"체게바라, 카스트로, 이자벨 아자니 같은 유명한 사람도 이 곳에 온 적이 있어요."


그러자 옆 테이블에 있던 분께서 우리의 대화를 거들었다.

"참고로 옛날에는 이 곳에 술 파는 바도 있었지. 저 안에 있는 레스토랑은 예전에 없었지만."


내부 안쪽으로 들어가면 꽤 커다란 레스토랑이 있는 건 예전에 온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나는 카페의 역사 이외에도 과거 이 곳의 분위기 등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커피값을 계산하려는데, 카페 주인분께서 내 손목을 잡으며 커피는 자신이 제공하는 것이라며 그냥 가라고 하셨다.


디두슈 무라드 거리에서 빠져나와 랑그독 가 Rue du Languedoc에 가기위해 골목길에 들어섰다. 카뮈 이모부 집을 찾기 위해서인데, 지금 랑그독 가의 이름은 모하메드 투일렙 거리 Rue Lt Touileb Mohamed.

거리의 입구에 있는 옷 수선집의 디자인이 이채롭다

카뮈가 병든 몸을 추스를 수 있던 이모부 집은 커다란 현관과 4개의 침실, 후면에 있는 정원 등이 있던 이 아파트였다. 아직도 남아있는 이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면 정말 큰 현관이 있었는데, 그다음 왼쪽 복도로 가야 할지 오른쪽 복도로 가야 할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양쪽 다 아코 이모부의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침 위 층에서 내려오던 어느 분께 혹시 이 아파트 내에 정원이 존재하느냐고 물었지만 그분은 알지 못했다. 카뮈는 이 집 뒤뜰의 레몬나무 아래에서 책을 읽었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인데, 현관 이외의 공간은 진입하기 어려워 뒤뜰의 존재조차 나는 알 수 없었다.

아코 이모부 집 앞

아파트에서 나와 두리번거리는 내가 신기했던지 동네의 여러 친구들이 내게 다가와 사진을 부탁했다.

사진을 찍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2 - 평생의 스승, 장 그르니에

알제에서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받은 충격, 이 책이 내게, 그리고 나의 많은 친구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서 오직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한 세대에 끼친 충격 이외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대표작인 <섬>의 서문에서 카뮈가 쓴 글.




수도 알제의 히드라 Hydra 지역. 내가 알제리에 처음 온 이후 몇 년 동안 살았던 곳이나, 나는 이 곳을 잘 알지 못한다. 비슷한 크기의 언덕들이 이어지는 데다 길은 구불거려서, 동네를 걸어서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때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알제리는 매우 위험한 나라니 밖에 함부로 나가지 말라는 주위 사람들의 의견이 많았다.


카뮈와 그르니에 모두에게 인연이 있는 파크 디드라 Parc d'Hydra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름에 Parc가 있어서 공원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 이 곳은 그저 조용한 주거지역에 불과하다.


히드라는 알제에서도 부자동네로 손꼽히는데 최근 들어 높다랗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빌딩들이 많이 들어서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특한 형태의 모스크, 빌라와 저층 아파트로 기억되는 곳이었는데, 풍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파크 디드라의 건물들

파크 디드라 동네가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카뮈와 그르니에가 살았던 장소를 찾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아무리 찾아도 그들이 살았던 곳의 번지는 인터넷으로도 혹은 내가 가진 책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았기 때문.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동네의 작은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결국 나는 포기를 해야 했다.


당시 장 그르니에는 제자들을 집에 초대하여 함께 대화를 나누고 책을 매개로 소통했는데, 1934년에 결혼한 카뮈 부부의 신혼집은 그르니에와 같은 동네였기 때문에 그들을 더욱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스승과의 친교로 인해서 카뮈의 세계는 급속하게 확장될 수 있었다.




동네의 어느 삼거리에 위치한, 새로 문을 연 카페 겸 제과점에 들어갔다. 내 마음 속으로는 어느 나이 많으신 분을 만나 카뮈 혹은 장 그르니에에 대한 어떤 정보라도 얻게 되길 바랬지만, 카페 안에는 젊은 친구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커피를 기다리면서 나는 노란 옷을 입은 젊은 주인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파크 디드라의 경계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좀 차이가 있었다.


카페 안에서 만난 사람들

번지를 알지 못하는 한 사실 동네의 경계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일. 나는 동네 분위기나 더 알아보자는 심정으로 카페에서 금방 일어섰다.


거리의 담장에는 빨갛고 노란 히비스커스의 꽃이 있었고 중간중간 거대한 거목들이 하늘 높이 솟아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의 집을 뒤져볼까도 생각해봤지만, '하얀 치장벽토로 마감한 상자 같은 주택'은 이제 잊기로 했다.

파크 디드라의 식물들. 히비스커스와 야자수.

파크 디드라에서 아래로 향하는 동안 계곡 맞은편에 위치한 동네가 보였다. 라 르두트 La redoute라 불리던 이 동네에는 젊은 카뮈를 후원하던 라피 일가가 있던 곳인데, 카뮈도 자주 방문했다. 인정 많았던 라피 집안은 카뮈에게 튀니지 여행을 주선한 적이 있는데, 여행에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카뮈가 각혈을 하는 바람에 그는 국경을 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카뮈는 이때 튀니지에 가지 못했고 또한 이후에도 방문 기록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그는 튀니지에 간 적이 없는 걸로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튀니지 시디 부사이드의 유명한 카페 Café des nattes에 카뮈의 액자가 걸려있는 건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카뮈에게 단순한 문학적 스승을 넘어섰던 장 그르니에와의 첫 만남은 1930년쯤이었는데, 당시 카뮈는 '상급 1학년 철학반'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 철학교수가 장 그르니에였는데, 그로 인해 카뮈는 프랑스령 알제리를 넘어 책과 사상의 세계에 연결될 수 있었다. 그르니에는 당시 32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중해의 삶에 대한 감상을 적은 몇 권의 작은 철학서를 출판한 상황이라 당시에도 이미 어느 정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 <섬>, p.77)


이 구절을 좋아하는 사람은 참 많다. 사람들로 하여금 여행의 길로 빠지게 만드는 마법과 같은 말. 위 구절에 카뮈도 역시 강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알제의 저녁 속을 걸어가면서 되풀이해 읽을 때면 나를 마치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주던 저 일종의 음악 같은 말이었다.


취한 사람처럼 그가 걷던 알제의 저녁은 어디였을까.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어딘지 알 수는 없다. 어쩌면 알제 시청이 있는, 바다가 보이는 대로는 아니었을지 나 혼자 추측해볼 뿐이다.

알제 시청 앞. 혹시 그가 걷던 알제의 저녁 속은 이 곳이었을까.

한편 알제의 상징 중의 하나인 중앙우체국 La grande poste 근처에서 1932년 19살의 카뮈는 자신의 스승에게 과연 자신이 책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중앙우체국 정면
중앙 우체국 천장의 모습

그르니에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일찍이 카뮈의 능력을 알아봤던 그는 제자로 하여금 『쉬드』(Sud)라는 조그만 월간 문예지의 발간을 독려해주었다고 한다. 그뿐일까. 당시 유명했던 막스 자콥 Max Jacob에게 카뮈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카뮈는 프랑스 현대 문인들과의 이어질 수 있는 최초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코 이모부, 장 그르니에 등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인해 카뮈는 위기를 벗어나 더욱 성장하고 작가로서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카뮈 혼자만의 힘으로 그의 업적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데, 그 또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내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인물도 없다. 그와 함께 두 시간쯤 보내고 나면 나는 풍요로워진다. 내가 그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 알게 될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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