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타파 병원의 모습. 이 곳에서 카뮈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1 - 폐결핵, 그리고 입원
17살이었던 1930년, 그는 기침을 심하게 하고 이틀씩이나 피를 토하는 등 이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결국 그에게 폐결핵 진단이 내려지고 그는 무스타파 병원 Hôpital Mustapha Pacha에 입원하게 된다. 병원 내 대부분의 환자가 이슬람교도인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겁을 먹었다.
폐결핵, 그리고 그로 인한 허약해진 신체는 평생 동안 카뮈를 괴롭혔다. 병으로 인해 그는 그가 계획된 삶을 살지 못했는데, 확실했을 교수직을 놓쳤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병역 면제를 받아야 했다. 그는 군대에 가고 싶어 했으나 건강으로 인해 입대를 하지 못했던 것. 한편 그는 평생 신약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는데, 아쉽게도 그가 신약 치료를 하려던 때는 이미 그의 폐는 회복 불능 상태였기 때문이다.
1954년 12월 11일 즉, 41세 때 그가 쓴 글을 보자.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다. 계속적으로 신열이 내리지 않아 만사에 의욕이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아야겠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 삶이 손쉬운 것이기를 바라지 않지만 삶이 어려운 것이라면 나도 그것에 버금가는 힘을 갖고 싶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면 통제가 필요하다. (<작가수첩 Ⅲ>, p.192)
그는 지독한 가난에 이어 질병까지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수긍했지만, 적어도 강해지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병을 그가 제어하기에는 병의 상태가 꽤 심각했다.
그의 병이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의사는 그에게 아무런 희망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그렇다고 확신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긍정과 부정 사이> 초고)
무스타파 병원은 그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나는 병원 근처에 위치한 대형시장에 가끔 장을 보는터라 이 곳을 지나치곤 하는데, 항상 병원 내외부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무래도 알제리의 넉넉지 않은 병원 인프라로 인한 것일텐데, 병원 내부에는 주차공간이 충분하지 않아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정문에 들어서자 지도가 그려진 안내판이 보였다. 나는 과연 카뮈가 입원했을만한 곳이 어딜지 추정해보려 했지만 안내판에는 주요 건물만 표시되어 있을 뿐 '폐결핵'과 관련된 단어는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병원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건물은 오래되면 점점 허물어지지만 나무는 오래될수록 더 찬란해지는 경우가 많다병원 내부에는 상당한 면적이 녹지로 할애된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녹지는 프랑스의 전형적인 조경양식대로 강한 축과 가로수, 화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목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식물이 사람들에게 얼마만큼의 위안과 위로를 주는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인들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그의 초기 작품 <빈민가 병원>은 완전히 성숙치 않은 나이에 죽음을 가까이 마주했던 그가 이 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지은 글이다.
"그 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만 떠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지" 하고 환자 중 하나가 말한다.
그러자 "맞아, 부자들이나 걸릴 만한 병이지"라고 누군가 대답한다.
당시 폐결핵은 부자들이나 걸릴 만한 병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병에 대한 별다른 약물이 개발되지 않았던 때라 잘 먹고 잘 쉬는 게 해결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가난했던 카뮈는 자신의 병에 대해 더욱 불안해했을 것이다.
어려운 의학용어를 하나하나 살펴봤지만, 폐결핵과 관련된 단어는 찾지 못했다
병원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내 친구가 폐결핵으로 인해 입원해있는데,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내가 한 질문에 스스로가 웃겨서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지금 세상에 없는 카뮈를 내 친구로 만들다니. 나의 거짓말에 그가 대답했다.
"이 길을 타고 끝까지 오르막길을 오른 다음 왼쪽으로 가보세요."
대형병원이라 그런지 병원 부지는 거대했다. 오르막길의 끝에 올라 오른편에 있는 건물 앞을 우연하게 보게 되었는데, 그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서있었다. 외국인인 내가 신기했는지 나를 보고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그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그들의 얼굴 형태는 많이 일그러져 있거나 아니면 붕대를 감고 있었기 때문. 그 건물은 안면윤곽 치료시설이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는 오른편이 아닌 왼편으로 향해 걸었다. 이내 폐결핵 환자들이 입원해있는 병동에 도착했다.
폐결핵 병동. 어쩌면 카뮈가 입원했던 건물이 이 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입구에 들어서자 간호사 분이 내게 물었다.
"누굴 찾아오셨나요?"
"음... 모함메드요."
알제리에 가장 흔한 이름을 나는 둘러댔다. 이 날 거짓말만 몇 번 했는지 모른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분의 성은 어떻게 되죠?"
"... 아, 모르겠어요."
내 대답이 이상할 법한데도 그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나를 남자병동인 2층으로 데려갔다. 나는 빠르게 그녀의 뒤를 쫓아 2층에 올라섰는데, 복도 양 옆으로 여러 개의 병실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복도 끝 좌측의 어느 병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 후 큰 소리로 외쳤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죠, 환자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녀는 그런 식으로 모든 병실을 다 확인할 기세였다. 가상의 인물인 모함메드를 찾기 위해 그녀는 최선의 노력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고 거의 도망치다시피 2층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현재는 2층은 남자, 3층은 여자 병실로 사용되고 있다카뮈는 병원에서 퇴원할 때 주치의는 그에게 태양이든 바다든 겁내지 말고 인생을 만끽하라고 권했다. 카뮈는 그를 의사라기보다는 친구이며 철학적 조언자로 여겼는데, 그의 말에 따라 수영을 계속했고 여름의 태양도 겁내지 않았다.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조언은 아닐 것이다. 겁내지 말고 인생을 만끽하라는 말이.
#2 - 바다를 향한 묘지
나는 예민한 감각을 지닌 여행자에게는 알제에 가거든... (중략)... 아랍 사람들의 공동묘지를 찾아가 보라. 우선은 그곳에서 고즈넉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서, 다음으로는 우리들이 죽은 자들을 안치하는 저 끔찍스러운 죽음의 도시들이 얼마나 한심한 것인가를 바로 헤아려보기 위하여.
(『결혼 · 여름』, <과거가 없는 도시들을 위한 간단한 안내>, p.129>
이번에 갈 곳은 엘 케타르 공동묘지 Cimetière El Kettar. 묘지라는 점에서 내키지는 않지만 카뮈가 찾아가 보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예민한 감각을 지닌 여행자라는 조건이 있다. 과연 나는 이 조건에 충족이 되는 걸까.
지중해 바다를 보고도 점점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지금은 내가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알제리에 처음 왔을 때는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지중해 바다에 매번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바다를 볼 때마다 바다로 향한 언덕길을 내려갈 때 지중해 바다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해수면이 지표면보다 높게 위치한 것과 같은 이 착시효과는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가끔 이야기하는 걸 듣는다. 어쩌면, 혹시 내 주변 사람들과 내가 모두 예민한 감각을 가진 것은 아닐지 궁금해졌다.
묘지 인근의 내리막길. 바다로 빠져들 것만 같은 느낌이 난다.엘 케타르 묘지는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자스민 향기를 증류하던 장소였는데, 지금은 알제의 대표적인 공동묘지 중 하나가 되었다. 14ha에 이르는 큰 면적이라 입구가 여러 곳에 나있었는데, 그중에서 나는 남쪽으로 난 입구를 통해 진입했다.
막상 묘지 입구를 보니 선뜻 들어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묘지 입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수많은 묘공동묘지 안은 수많은 묘와 나무가 뒤섞여 있었다. 장 그르니에가 '이슬람교도들은 죽어서까지도 대자연과 친근하게 어울려 지낸다'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카뮈의 글을 보면 선생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는다.
나무 밑에서 쉬고 있던 어떤 아저씨 분은 카뮈가 말한대로 '고즈넉한 평화'를 즐기는 것 같았지만, 나는 묘를 밟지 않기 위해 휘청거리며 길을 걷느라 그런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다. 묘지에 무덤이 너무 빼곡히 있던터라 어느 묘는 좁게 난 통행로를 점유하고 있기도 했다.
수많은 묘가 위치한 공동묘지하지만 적어도 그가 말한 '끔찍한 죽음의 도시'는 이해될 수 있었다. 묘지 너머로 무분별하게 지어진 건물들에는 자연의 풍경을 배제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더 먼 곳에는 채석장이 있었는데, 산의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프랑스 식민시절 아랍인들은 법적으로 평지에 묻힐 수 없었기에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이런 가파른 산지가 장지로서 유일한 선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제시대 도심은 일본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생활의 터전을 산으로 삼을 수밖에 없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렇듯 식민지배는 비슷한 속성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바다를 보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는데, 예상대로 지대가 높고 시야가 뚫린 곳에서는 멀리 푸른 바다가 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전망을 보며 여행자로서의 감상에 젖기에 적당치 않았는데, 군데군데 묘를 손보고 있는 망자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묘를 손보고 있던 어느 가족
들꽃에 파묻혀 묘의 정확한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한국에 있었을 때는 공동묘지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는데, 해외에서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공동묘지에 방문하게 되는 일이 생기곤 한다. 파리의 페르 라 쉐즈 묘지 Cimetière du Père Lachaise에서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의 묘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때가 내게는 그 시작이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이 영국의 유명한 작가가 알제리에 여행한 적이 있다.
바다쪽 경계에서 묘지 입구쪽으로 다시 되돌아나오는데 붉은색의 제라늄을 발견했다. 가만, 그의 일기에서 제라늄이 묘사된 것을 나는 기억해냈다.
11월 5일. 엘 케타르 묘지... (중략)... 분홍빛과 붉은빛을 모두 가진 제라늄 하나, 그리고 상실한 채 말이 없는 거대한 슬픔은 우리에게 죽음의 순수하고 멋진 얼굴을 보여준다. (<작가수첩 Ⅰ>, p.109)
묘의 한가운데 심긴 붉은 제라늄
엘 케타르 묘지보다 사실 파도가 치는 바다에 바로 인접한 묘지가 더 인상적인 게 사실이다. 알제에서 서쪽으로 100여 km 정도 떨어진 곳의 구라야 Gouraya 지역에는 그런 곳이 있다.
놀라운 건 이 해변의 묘지 바로 옆에 주거지역이 위치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곳에 처음 갔을 때는 어느 집의 대문이 열리더니 그 곳에서 아이가 뛰어나와 집 앞에서 놀고 있었다. 묘지에서 아이는 천연덕스럽게 놀고 있었다.
푸른 계열의 색이 층층이 자리한 바다, 그리고 해변의 묘지바다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망자들의 마지막 흔적. 엄숙함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이 풍경을 카뮈는 보았을까. 폴 발레리 Paul Valéry의 유명한 시 <해변의 묘지>에서 이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카뮈가 말한 '고즈넉한 평화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 곳이 엘 케타르 공동묘지보다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편 폴 발레리와 카뮈에게서는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죽음에 굴하지 않고 생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자 했던 점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