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리고 밥 엘 우에드

바다에서 시작된 연극인의 삶 / 인종의 아름다움, 밥 엘 우에드

by 에트랑제
그가 연극을 처음 상영한 파도바니 무도회장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1 - 바다에서 시작된 연극인의 삶


소설은 지속적인 긴장을 요구하는 반면, 연극은 반복적인 휴식을 허용하거든. (카뮈가 오딜 말레 Odile Mallet에게 했던 말)




카뮈는 평생을 연극과 함께 했는데, 아마추어 극단을 조직하게 되면서 연극과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는 첫 작품으로 앙드레 말로 André Malraux의 <분노의 시대>를 각색했고, 당시 노동극장 Théâtre du Travail이란 이름의 극단 구성원은 대부분 그의 친구들이었다. 공연을 위해서 작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다행히 말로는 카뮈에게 "공연하시오"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 공연의 준비는 순탄하지 않았는데, 자금이 부족했고 단원들의 연습시간마저 넉넉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극단은 극적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극장을 고민하다 결국 밥 엘 우에드 Bab El Oued의 파도바니 수영장 Bains Padovani이 선택했다. 해변의 모래밭에 말뚝을 박아 지은 탈의장과 카페 사이에 있는 무도회장은 폭이 15미터, 길이가 40미터이었으며, 지중해 쪽으로 창들이 나 있는 널찍한 곳이었다.


나는 파도바니가 지금 엘 케타니 El Kettani로 불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파도바니를 찾기 위해 근처로 가서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대개 이 곳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들이 많이 찾는 곳인데, 내가 간 날은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차표에 손으로 주차시간을 적는 요금징수원 아저씨
지하 주차장의 우측에 있는 공간. 쉬는 날에는 아이를 가진 가족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인터넷으로 찾은 파도바니를 찍은 흑백 사진을 가지고, 극장이 정확히 어느 곳에 있었을지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바다를 향해 계단을 내려갔는데, 해변에도 인적은 드물었다. 한참 개발 중이라 바닥에 공사용 골재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해변을 향해 내려가는 길

나는 해변에까지 간 다음, 뒤를 돌았다. 일자 형태의 단순하고 흰 건물 하나만 보일 뿐이었고 이 곳이 과거 화려했던 파도바니 무도회장이라는 걸 증명하는 다른 어떤 흔적도 없었다. 흰 건물 앞에는 조그만 어선 몇 척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과거에는 바닷물에 말뚝을 박고 바다를 향해 창을 낸 시설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춤은커녕 수영마저 힘든 해변이 되어가고 있었다.

개발 중인 해변가

나는 몇 년전에 이 곳을 와본 기억을 되살려냈는데, 불과 몇 년만에 해변의 모습이 많이 바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이 곳이 카뮈가 말한 파도바니라는 걸 알지 못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사라진 파도바니가 아쉬운 건 그의 첫 연극 장소였다는 이유뿐만은 아니다. 그가 댄스홀에서 마주했던 풍경 또한 찾을 길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도바니의 해변에서는 매일같이 댄스홀이 문을 연다. 그 긴긴 해안으로 온통 다 활짝 열려 있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상자 속에서 동네의 가난한 젊은이들은 해가 저물도록 춤을 춘다. 몇 번이나 나는 거기에 가서 어떤 기묘한 순간을 기다리곤 했다. (<결혼, 여름>, p.40)




시간이 흐른 뒤 카뮈는 친구들과 함께 노동극장을 대신하는 집단극장 Théâtre de l'Equipe을 설립했다. 그는 '젊은 연극을 위하여'라는 선언문에서 이 극단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작업과 연구, 대담성을 슬로건으로 하는 극장의 설립 목적은 번영이 아니라 원칙과 타협하지 않고 견디는 것이다.


번영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니 역시 카뮈다운 발언이다. 시 극단의 배우들은 누구나 무대장치를 옮기거나 다른 허드렛일을 거들었고, 리허설을 마치면 모두들 학생식당 Brasserie des facultés 으로 가서 야외 테라스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었다.


집단극장은 총독부의 피에르 보르드 공연장 Salle Pierre Bordes(현재 이름은 이븐 칼둔 공연장 Salle Ibn Khaldoun)을 이용했는데, 당시 이 곳은 큰 크기에 비해 대관료가 쌌다. 카뮈의 친구 건축가 에므리 Pierre-André Émery는 음향 상태가 빈약하기 때문에 세가 싼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는 이븐 칼둔 공연장을 찾아가기 위해 중앙우체국 부근에서 걸어올랐다. 경사가 가팔라서 중간중간에 쉬어갈 수밖에 없었는데,는 때면 멀리 있는 바다가 시야에 보였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상선이 여러 채 떠있고 바다는 잔잔했다. 오르막길에 조성된 긴 녹지에는 중간중간 도미노 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아저씨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광장에는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차지였다.

공연장으로 올라가면서 바라보는 바다

가빠진 숨을 참고 공연장 안에 들어섰다. 나는 그 전에 이 곳에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과거 국제 규모의 음악 페스티벌, 한국 대사관 주최의 문화행사 등에 열렸기 때문이다. 공연장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커보였는데, 당시 집단극장의 관객은 기껏해야 4백 명 정도였다고 한다.

공연장 내부 모습




#2 - 인종의 아름다움, 밥 엘 우에드


나는 그의 연극 경력이 처음 시작됐던 파도바니를 빠져나와 맞은편에 위치한 밥 엘 우에드 Bab El Oued 중심가로 향했다. 중심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공원을 지나쳐야만 했었는데, 벤치에 앉아 계시던 노인분께서 내게 다가오시더니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하셨다. 막상 내가 카메라를 그분들에게 들이대니 한 분은 자리를 급히 떠나시고, 또 다른 한 분은 얼굴을 손으로 가리셨다.


사진 왼쪽의 할아버지만 사진을 좋아하셨던 모양이다

밥 엘 우에드는 아랍어로 '하천 통로'로 해석되는데, 주변에 비해 지대가 낮아 빗물이 모여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내게는 우리나라 종로와 같은 느낌인데 구시가지의 공간적인 한계로 인해 확장이 불가능하다는 점, 작은 상점들이 많고 또 노인 분들이 유난히 많이 보이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카뮈의 소설에도 곧잘 등장하는 이 곳은 카뮈의 시절에는 유럽인들이 많이 모여 살던 지역 중 하나였다.


중심가에 가까워지기 전 나는 어느 카페에 들려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에 30 디나. 커피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젊은 친구들이 다가와 내게 질문을 했다. 내 국적이 어딘지 알제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어느새 질문의 개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나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페 안 쪽에 자리 잡았다.

괴테는 죽어가면서 빛을 달라고 했는데 이는 역사적인 말이다. 벨쿠르에서는, 그리고 밥 엘 우에드에서는 노인들이, 카페의 저 안쪽에 앉아서 머리에 기름을 발라 쫙 붙인 젊은이들이 허풍을 떨어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결혼 · 여름』, <알제의 여름>, p.35)


내 바로 옆에 앉아있는 노인 한 분은 담배에 불을 붙인 채 카페 바깥에 있는 젊은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카뮈가 말한 표현과 꽤 들어맞는 광경이라 나는 꽤 놀랐다. 가난한 동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카페에는 노인이 있고, 젊은이들끼리 모이면 서로 허풍을 드러내기 바쁘니 말이다.

카페 안에서의 어느 노인

나는 카페에서 나왔다. '세 개의 시계 Trois horloges'라 불리는 곳에 이르렀는데, 예전에는 이 곳이 밥 엘 우에드의 중심이었다. 도로에 차가 많아지면서 이 곳은 더이상 중심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는데, 이제는 이 시계를 바라보는 사람조차 거의 없게 되었다.

한 때 이 지역의 상징이었던 시계

중심가이다 보니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 날은 주말을 앞뒀던 날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우리가 알제에서 좋아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나 다 향유할 수 있는 것, 길 모퉁이를 돌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바다, 어떤 햇빛의 무게, 인종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다.
(<결혼,여름>, p.33)


그가 언급한 3가지 즉, 바다, 햇빛, 인종 중에 인종의 아름다움은 지금 알제에서 발견하기는 어렵다. 1962년 알제리 독립 이후 유럽인과 유대인 대부분은 알제리를 떠났고, 2000년대 초반의 알제리 내전은로 인해 그나마 별로 없던 외국인의 숫자가 더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뮈의 시절에는 알제리에는 다양한 인종이 혼재되어 살고 있었다.


당시 밥 엘 우에드에는 스페인 구역 Quartier Espagnol 혹은 바제타 La Basetta라 불리던 곳이 있었는데, 이 지명은 빨래장이라는 스페인어 Balseta에서 온 단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 때는 스페인 여자들이 빨랫감을 들고 다녔다는 얘기. 나는 이 곳을 가면 어쩌면 스페인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으로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길 위에는 과거 사진과 달리 빨래터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해봤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특별히 스페인 사람의 느낌은 나지 않았고 전형적인 알제리인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과거 빨래터였던 곳의 맞은 편에는 시청이 있었는데, 외국인인 나를 보기 위해 몰려든 아이들 때문에 조용했던 거리가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시청 앞에서의 아이들

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던 아이들 중 한 아이가 어느 순간 나보고 뒤를 쳐다보라고 손짓했다. 왜 그러냐는 나의 몸짓에 사진을 찍는 시늉을 하는 아이.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뼈대만 남은 어느 건물

내 뒤에는 저물어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뼈대만 남은 건물이 있었다. 아이들은 시청 앞 작은 공간에서 뛰어놀면서 매일같이 이 건물을 쳐다봤을 것이다. 화려했던 과거는 없어지고 황량한 느낌만을 주었다.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언덕길을 내려왔다. 내려오다본 어느 집 철문에는 그 건물이 지어진 년도인 1931이 적혀 있었는데, 1931년이면 카뮈가 자신의 동네를 벗어나 알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을 시기다.

어느 아파트의 철문

나는 어둑해지고 있는 거리를 내려와 차에 탔다. 그 때 걸려온 현지인 친구의 전화. 어디있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밥 엘 우에드에 있다고 했다. 그가 물었다.


"거기는 왜 갔니?"


"인종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


친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나도 안다. 지금에 와서 인종의 아름다움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어느새 어둑해진 밥 엘 우에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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