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독립에 대한 그의 입장 / 그가 잠들어있는 곳
#1 - 알제리 독립에 대한 그의 입장
그 점에 대해 나는 나의 입장을 분명하게 정리해두려고 노력했다. 내 생각으로는 단순한 정의에 입각해 보더라도, 여러 민중의 연방 형태로 결성되어 프랑스와 결합한 알제리가 이슬람 제국과 결합한 알제리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바람직해 보인다. 이슬람 제국은 이곳의 아랍계 민중들을 위해서는 기껏해야 가난과 고통을 보탤 뿐일 것이고 알제리의 프랑스계 민중을 그들 본래의 조국에서 떼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알제리 연대기'에 붙인 서문> 중)
제르맨 티이옹 Germaine Tillion은 내게 11세에서 12세 사이의 아랍인 학생들 30명이 쓴 작문들도 보여준다. 아랍인 교사가 아이들에게 "만약 여러분들이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그에 답하는 글을 쓰게 한 것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무기를 들고 프랑스 사람들이나 공수대원들이나 정부 지도자들을 죽이겠단다. 미래에 대해서 절망적이다. (<작가수첩 Ⅲ>, p.288)
우리는 <콩바>에서, 알제의 군사법정이 알제리 원주민 보병 둘에게 적에 투항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이제 막 보아서 알 수 있었듯이 알제리 양민은 프랑스 시민과 똑같은 의무를 강요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일은 지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귀 신문이 여론에 널리 알려주실 것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그와 같은 비교는 우리 나라의 법정이 이제 막 프랑스 국민과 알제리 민족에게 한 기이한 윤리적 교훈을 평가할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희망합니다. (<오직 졸병들만 배신한다ㅡ알베르 카뮈와 르네 샤르가 '콩바'에 보낸 편지>, 1949년 3월 14일)
테러리스트가 벨쿠르 시장에 수류탄을 던져 그곳에서 장을 보고 있던 나의 어머니를 죽인다면, 설혹 내가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 테러리즘을 옹호했다 하더라도 나는 그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나는 정의를 사랑하지만 내 어머니 역시 사랑하기 때문이다.
랑베르가 말했다. "나는 어떤 것이 내 직무인지를 모르겠어요. 아마 사랑을 택한 것이 정말 잘못일지도 모르겠군요." 리외는 랑베르를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페스트>, p.181)
"그런데 왜 선생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을 말리지 않으시나요? 말릴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요." 리외는 언제나와 같은 동작으로 고개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것은 랑베르의 문제이고, 랑베르는 행복을 택한 것이며, 리외 자신은 그에 반대할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고, 그 문제에 관해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위의 책, p.219)
희곡. 도라 혹은 다른 여자. "선고받은 사람들. 영웅이 되고 성자가 되도록 선고받은 사람들. 강요된 영웅. 이런 것에 관심이 없으니까, 아시겠어요, 끈끈이처럼 몸에 달라붙는 이 중독되고 어리석은 세계의 더러운 일 따위엔 관심이 없으니까. ㅡ 솔직히 말해봐요, 솔직히, 당신이 관심 있는 것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얼굴들이라고...... 진리를 찾는다고 내세우긴 하지만 결국 당신이 기대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라고......" (<작가수첩 Ⅱ>, p.289)
땅을 돌려주시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너무나 가난해서 한 번도 무엇을 원하고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모든 땅을 주시오, 이 나라에서 이 여자와 같은, 대부분 아랍인이고 얼마간은 프랑스인인, 고집과 인내만으로 여기서 살고 있고 살아남은 엄청난 수의 비참한 무리들에게 땅을 주시오. 신성한 것은 신성한 사람들에게 주듯이. 그렇게만 되면 나는 다시 가난해지고, 세상 끝 최악의 유적에 던져진 나는 미소를 짓고 내가 태어난 태양 아래서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땅과 내가 우러러보았던 사람들이 마침내 한데 모였다는 것을 알고서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 겁니다. (<최초의 인간> 중)
적어도 현재 전개하는 활동에서 아랍 운동원들을 석방시키거나 경찰의 탄압으로부터 그들을 숨겨야 하는 문제가 생길 경우, 언제든 나의 이름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다니엘 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1955년 3월 25일)
하지만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분노에 카뮈 또한 빗겨갈 수는 없었다. 티파자의 있는 그의 기념비에 그의 이름이 훼손된 것만 보더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 - 그가 잠들어있는 곳
루르마랭. 그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첫 번째 저녁. 뤼베롱 산 저 위에 뜬 첫 별. 엄청난 침묵, 사이프러스 나무의 우듬지가 내 피로의 저 깊숙한 곳에서 떨고 있다. 엄숙하고 엄격한 고장 ㅡ 마을을 흔드는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작가수첩 Ⅱ>, p.217)
그는 알제리가 아닌 프랑스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때 살았던 지역은 프랑스 남부 루르마랭 Lourmarin이었다. 알제리와 유사한 풍경을 가진 이 곳에 대한 여행을 이 글의 마지막으로 장식해보고자 한다.
1945년쯤 카뮈는 루르마랭에 처음 갔다. 작가 앙리 보스코 Henri Bosco의 초대를 통해 여러 작가와 친구들과 가게 된 것이었는데, 아마도 그때는 그가 이 곳에 집을 구입하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루르마랭 묘지에 앙리 보스코와 함께 묻히게 될 사실 또한. 아마도 카뮈가 루르마랭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장 그르니에를 통해서였을 것인데, 장 그르니에는 알제의 고등학교에서 알베르 카뮈를 가르치기 바로 직전 루르마랭 성에서 연구원 자격으로 지낸 적이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상금을 받게 된 카뮈는 드디어 자신만의 집을 구하기로 한다.
뤼베롱 산등성이로 난 길로 르네 샤르와 세 번이나 장거리 산보를 하다. 세찬 빛, 광대무변한 공간이 나를 흥분시킨다. 또다시 나는 이곳에 살고 싶고 내게 맞는 집을 구하고 싶고 드디어 좀 정착을 해보고 싶다. (<작가수첩 Ⅲ>, p.348)
카뮈와 그의 아내는 작은 마을 루르마랭에서 여러 집을 둘러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의 집을 카뮈가 아주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는데 그 집을 보기 전까지 무려 15채의 집을 둘러보느라 지쳐버린 카뮈 부부는 결국 계약을 한다. 향후 카뮈는 루르마랭에 정착하고 난 후 장 그르니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선생님의 족적을 따르고 있습니다.
나는 액상프로방스에서 버스를 타고 루르마랭으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에는 몰랐지만 루르마랭은 정말 작은 마을이라 사실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나는 가던 도중 버스에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마을 중심에서 발견한 지도에서 카뮈가 생애 마지막을 보낸 집의 위치를 확인하고, 알베르 카뮈 가 Rue Albert Camus에 접어들었다. 드디어 마주친 그의 집. 문은 닫혀 있었지만, 굴뚝 위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누군가 여전히 살고 있는 듯했다.
이 집으로 이사온 카뮈는 텅 빈 집에서 이런 글을 남긴다.
끊임없는 빛.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집에 여러 시간 동안 우두커니 서서 포도나무의 붉은 낙엽들이 거센 바람에 불려서 이 방 저 방으로 날아드는 것을 보다. 미스트랄 바람. (<작가수첩 Ⅲ>, p.350)
다음 해. 파리와 루르마랭을 오고 가던 그가 남긴 글은 이렇다.
루르마랭 도착. 흐린 하늘. 정원에는 물을 머금고 무거워진, 과일처럼 풍미 있는 기막힌 장미꽃들. 산책. 저녁에는 붓꽃의 보라색이 더욱 짙어진다. 몹시 지쳤다. (위의 책, p.359)
내가 루르마랭을 찾았던 때는 겨울이라 장미꽃이나 붓꽃을 즐길 수 있는 없었다. 나는 그의 집을 뒤로하고 이제 그가 묻힌 묘지로 가기로 했다.
하늘 꼭대기에서 쏟아진 햇빛의 물결이 우리들 주위의 들판에서 거세게 튀어 오르고 있다. 이런 소란에도 모든 것이 잠잠하기만 하고, 저기 뤼베롱 산맥은 내가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 듣는 엄청난 침묵의 덩어리일 뿐이다. 귀를 세워 들어보면 멀리서 사람들이 내게로 달려오고 눈에 보이지 않는 친구들이 나를 불러 옛날과 다름없는 나의 기쁨이 커져간다. 또다시 어떤 다행스러운 수수께끼 덕분에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세계의 부조리가 어디 있는가? 이 눈부신 햇빛인가 아니면 햇빛이 없던 때의 추억인가? (<결혼, 여름>, p.145)
루르마랭 공동묘지에 이르면 돌담과 대문이 위치하고 있는데, 내가 이 곳을 찾았을 때는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공동묘지 부지가 크지 않은 데다 내부에 간단한 약도가 있어서 카뮈의 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중에 피에르 앙드레 에므리가 카뮈가 그토록 사랑했던 티파자의 쑥풀을 그의 무덤에 심었지만, 프로방스의 기후 때문에 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그 지방 토종 식물들을 위협할 정도가 되자 결국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붓꽃과 협죽도가 특히 무성했다.
묘비명이 아니었다면 일반인의 묘로 충분히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수수한 그의 묘.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파리의 팡테옹으로 그의 묘지를 이전하고 싶어했지만, 카뮈 유족들의 반대로 이 계획은 철회되었다. 분명 카뮈 역시 파리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며, 알제리에 유사한 이 곳에 그대로 묻히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 유사한 부분은 무엇일까. 첫 손으로 지중해의 '햇빛'을 꼽을 수 있다.
우리의 허무주의 중에서 가장 암담한 것과 만났을 때도 나는 그 허무주의를 극복할 이유들만을 모색했다. 그것도 무슨 미덕의 소유자이거나 보기 드문 영혼의 숭고함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속에서 태어났고 수천 년 전부터 그 속에서 인간들이 고통 속에서조차 삶을 찬양하도록 배워온 그 빛에 대한 본능적 충실성 때문에 그건 그랬던 것이다. (위의 책,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