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 / 알제리 동부
#1 - 최초의 인간
지난 1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거대한 무리들을 이룬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곳으로 와서 땅을 갈았고 어떤 곳은 점점 더 깊게, 어떤 곳을 가벼운 흙먼지만 불어와도 덮여 버릴 만큼 점점 더 시답잖게 밭고랑을 팠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잡초 우거진 원초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식들을 낳아 놓고 사라졌다. 이렇게 그들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 역시 오늘 자크 자신이 그렇듯이 과거도 윤리도 교훈도 종교도 없는 채 이 땅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그것도 밝은 햇빛 속에서 어둠과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에 사로잡힌 채 그렇게 된 것을, 행복해하고 있었다. (<최초의 인간> 중)
드레앙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창고 건물이 보이는데, TABACOOP 회사의 담배저장시설이다. 이 회사는 1920년대 만들어졌는데, 이를 통해 당시 이 주변은 포도뿐만 아니라 담배도 많이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카뮈는 1913년 이 곳에서 태어났고 그가 돌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사망했다.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어머니는 어린 두 아들 뤼시앵, 알베르를 데리고 알제의 서민 주거지역 벨쿠르에 있는 친정어머니 집으로 와서 정착했으니, 사실 카뮈는 이 집에서는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렇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덧없는 도시들을 건설해 놓고 나서 자신의 마음속에서도 남들의 가슴속에서도 영원히 죽고 마는 주워 온 아이들인 것이다. 마치 인간들의 역사가, 가장 해묵은 대지 위를 끊임없이 전진해가고 나서 그렇게도 보잘것없는 흔적들만을 남겨 놓은 그 역사가, 기껏해야 발작적인 폭력과 살인, 갑작스러운 증오의 폭발, 그 고장의 강들처럼 갑자기 불어났다가 갑자기 말라 버리는 피의 물결이 전부였다가, 그 역사를 진정으로 만든 사람들의 추억과 더불어 끊임없이 내리쬐는 햇볕에 모두 증발해 버리듯이 말이다. (위의 책)
공터쪽에 있는 카뮈 생가의 벽에는 그를 기념하는 또다른 명패가 벽에 붙어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이 명패의 글씨는 녹으로 인해 알아볼 수 없었다. 그의 표현대로 '증발해버린' 것이다.
#2 - 알제리 동부
본에서 몽도비까지 '길이 없는 곳' (<최초의 인간> 중)
튀니지 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안나바에서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서둘러 안나바의 호텔을 나왔는데, 한참 후 나는 여러 개의 화분을 호텔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화분들은 튀니지에서 사온 귀한 식물들을 말하는데, 그 때는 호텔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멍하니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호텔에 두고 온 녀석들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본(안나바의 옛 이름) 근처에서 우리는 '길이 없는 곳'을 향했는데, 굳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해안도로를 타고 바다를 보고 싶었을 뿐. 이 루트는 K의 의견이었는데, 그가 듣기로 이 해안가 경치가 좋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가는 루트 대부분이 산의 이곳저곳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라는 사실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에 산길에는 차가 거의 없었고 공기도 상쾌했다. 차가 많이 지나지 않으니 식물들은 점점 차도에 가까이 다가와 도로 일부를 점령하기까지 했다. 각종 침엽수들과 산딸기, 고사리류 등이 내 눈을 끄는 터라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가끔 시선을 허락하는 안나바 바다의 수평선은 떠오르는 해와 더불어 장관을 이뤘다.
시간이 촉박하지 않았기에 가끔 풍경이나 식물이 궁금할 때면 차를 세웠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파란빛을 띤 어느 초본류. 온몸에 가시를 품고 있는 녀석은 잎과 꽃이 파랬다. 자연에는 파란색의 식물이 꽤나 드물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질 수 밖에. 때로는 우리의 의지가 아닌 이유로 차를 세울 수밖에 없는 일이 생기곤 했는데, 다름 아닌 산에 방사되어있는 소떼 때문이었다. 녀석들 근처에 갈 때면 큰 뿔로 우리를 위협하는 듯 했고, 그 때마다 우리는 그 뿔에 차가 받힐까 두려워 거의 기어가는 속도로 그들을 지나쳐야만 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도로에 가로로 길게 놓인 나무기둥으로 발견했다. 더 이상 나아가지 말라는 의미로 누군가 놓아둔 것. K와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한참 서로를 바라봤다.
"저 쪽에 조그만 길이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볼까요?"
"아니요. 그쪽은 길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면...?"
"길이 막혔다면 우리가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
알제리에서는 이런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무거운 마음으로 핸들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카페가 있어 잠시 커피도 마실 겸 길을 묻기로 했다. 우리를 반겨주는 카페 주인과 동네 사람들. 그들에 의하면 아까 막힌 도로는 통제된 것이 맞고, 대신 다른 우회로를 타게되면 스킥다 Skikda로 빠지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다행히 안나바 시내까지 되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우회도로를 찾아냈고, 우리의 차는 점점 안나바 해안에 더 가까워졌다. 나는 캅 드 페르 Cap de fer를 지도에 입력했고, 어느덧 오래된 등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하얗게 칠해진 등대라 먼 바다에 있는 배들은 이 등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신기한 식물을 찾아 쭈그려 앉고, K는 등대 뒤 쪽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까운 것에, 그는 바다에 우선적으로 끌린 이유 때문이리라. 가까이서 보니 식물뿐 아니라 독특한 돌의 색과 형태가 내 눈길을 끌었다.
한참 뒤 고개를 들어보니 K는 등대와 절벽 사이의 아슬아슬한 공간에 서있었다. 물론 그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있었는데, 등대와 바다, 그리고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K가 만드는 실루엣이 한 편의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명화가 될 수는 없는 그림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볼록한 배 때문이다.
"바닷물에 몸 좀 담글까요?"
내가 하고자 하던 질문을 그가 했다. 우리가 있던 등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변이 있는 걸 확인하고,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 작은 해변은 하늘에서 보면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물이 맑고 모래바닥이라 수영을 즐기기에 좋아보였다. 나는 수영복이 없다는 걸 알고나서 잠시 고민했지만, 최대한 어두운 색깔의 속옷을 가방에서 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