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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만우절 웃을 수 없었던 장난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그 일을 떠올리면, 검은 물감으로 뒤덮인 교실에 얼굴 없이 가면을 쓴 수십 명의 학생이 떠오른다. 침묵하는 가면들 사이, 유독 또렷한 이목구비를 드러낸 두 명의 여학생이 보인다. 그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교단에 있는 선생님을 바라봤다. 이 기묘한 작전에서 제외된 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지만 선생님의 눈에는 수십 명의 가면 쓴 학생은 칠흑 같은 배경으로 여겨졌다. 민감한 감정의 바람이 일어나는 열일곱의 계절, 우리는 떠들며 놀다가도 그 사이를 분리하거나 구별시키는 어른들의 날 선 시선에 베이고, 상처받았다. 당시의 기분을 되짚어보면 가면 뒤에 얼굴을 감추고 있는데도, 발가벗은 것만 같은 부끄러움이 일어난다. 


그 일이 일어난 건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아이들은 왜인지 고약한 장난으로 내재되어 있던 감정의 울분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평소 담임선생님은 출중한 외모를 갖고 있는 여학생들에 대한 가시적인 애정을 자주 드러냈고, 그의 눈에 평범하거나 부족하면 관심 밖의 외로운 존재가 돼버렸다. 우리 반에는 유독 담임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두 명의 여학생이 있었다. 무리에 섞여 있어도 눈에 띄는 외모와 늘씬한 몸매를 갖춘 두 친구는 선생님의 호의와 친절을 받는 게 일상이었다. 담임의 총애 따위는 애초에 관심 밖이었지만, 외형적인 부분을 짚는 불쾌한 농담에 무안을 당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게 문제였다.

“쌍테 붙인다고 달라질 것 같아? 차라리 그 시간에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봐. 그런 노력으로 애초에 가망 없는 얼굴이면 공부라도 하는 게 더 나아.”

“넌 다리도 두꺼운 애가 교복치마는 왜 이렇게 짧아? 엉?”

얼굴과 몸매에 대한 신랄한 평가는 교실가 교실에서 난무했다. 얼굴이 못생겼으면 공부라도 열심히 하라는 말을 담임은 수식보다 더 자주 입에 올렸다. 과연 그게 반 아이들을 위한 조언이나 충고였을까. 이제와 떠올려 봐도 당시에 느꼈던 불쾌감은 더욱 짙어질 뿐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날리듯 내던지는 말들로 아이들의 마음에 ‘외모와 몸매에 대한 열등의식’을 잊지 말아야 할 급훈처럼 못 박았다. 

그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당한 수모의 감정이 터졌던 게 그날이었던 것 같다. 무리의 리더를 도맡던 걸걸한 친구는, 다른 반 학생들과 수업받는 교실을 바꿔서 선생님을 놀라게 하는 장난은 뻔하다고 말했다. 

‘다른 방법으로 담임을 골려주는 게 어때?’ 

선생님의 총애를 받던 두 친구가 교무실을 가서 자리를 비웠으므로 계획을 이행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1교시는 담임이 담당하는 수학 수업이었다. 우리는 장난을 제안한 친구의 진두지휘아래 동복 재킷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꼿꼿이 앉아있었다. 가면 대신 동복 재킷을 뒤집어쓴 우리의 모습은 채도 낮은 청록색 물감을 뒤집어쓴 우울한 유령 무리처럼 보였다. 나는 컴컴한 눈앞을 또렷이 응시하려 애쓰며 호흡했다. 긴장한 나의 숨소리가 귀에 바로 들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마음은 편안했다. 이렇게라도 여학생들의 외모를 운운하는 선생을 골탕 먹일 수 있다는 작은 기대감에 가슴은 쿵쾅거렸다. 담임은 청록색 무리를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의 첫 표정을 바로 볼 수 없는 게 아쉽기도 했고, 격앙된 목소리로 ‘다들 뭐 하는 짓들이야!’라는 호통이 들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드디어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과 두 학생들이 들어선 짧은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난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놀람과 당혹감의 감정을 수초 간의 침묵에서 읽을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너희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이후에 상황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뒤집어쓴 교복에서 벗어난 우리 모습은 담임의 곁에 있는 두 친구와는 대비되었다. 흐트러져 엉망이 된 머리와 불편한 호흡을 거듭하느라 붉게 상기된 얼굴들은 일그러졌다. 걔 중에서는 한 명이 울음을 터뜨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어차피 못생긴 애들은 취급도 안 하시잖아요. 대학교 가서도 변화할 가능성 없는 면상은 차라리 가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라는 물음만큼은 분명히 떠오른다. 


나는 슬픈 분노를 가진 채 매일 거울 속 자신을 혐오하는 시선으로 보았다. 어째서 키가 이토록 작은 것인지, 왜 얼굴은 호빵처럼 크고 치아는 삐뚤어진 것인지 조목조목 평가했다. 무심코 건넨 타인의 말에 상처받았으면서도 그들의 의견보다 더욱 가차 없는 비난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겉으로 보이는 외형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말은 책에서나 존재할 뿐, 실제 생활에서 외모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었다. 못생긴 여학생보다는 예쁜 여학생이 인기와 관심을 받았고, 그런 외형을 갖추지 못하면 공부라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회색 빛으로 그려진다. 흥미 없는 과목도 억지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도 싫었지만 그보다 더 싫었던 건 거리낌 없이 ‘여성의 얼굴과 몸은 늘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만든 어른들이었다. 그건 원치 않는데도 채득 하게 된 불행한 배움이었다. 뼛속까지 새겨진 그 말은 지금도 무심코 내 마음의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 ‘여학생이 그럼 안 되지.’, ‘얼굴이 안되면 몸매라도 괜찮던가, 그것도 안 되면 커리어라도 쌓아야지.’, ‘예쁜 외모는 사법고시 패스한 거랑 같아.’

난 그 말의 후유증을 겪으며 살아왔고, 그 의견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는 동시에 모두 순순히 받아들인 뒤에 내가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라는 자책감을 가졌다.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고 반응한다는 건 곧 그 화두를 내 안으로 받아들여 수긍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되잖아!’ 성인이 된 이후로 누군가의 평가에 반응하지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앎이 곧 변화를 만드는 건 아니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 이대로 괜찮아.’라는 말을 되뇌면서도 응답 없는 기도를 반복하며 신을 불신하는 성도처럼 자신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난 괜찮다는 말과 불신을 반복하며 러닝 머신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마치 무언가에 내쫓기는 사람처럼, 오늘 먹은 만큼 칼로리를 소모하지 않으면 몸이 부풀어 올라 터진다는 소름 돋는 위협을 받는 것처럼 불안해했다. 


자기 위안과 체중 감량은 내 불안을 잦아들게 만드는 데 효엄이 없었다.  ‘날씬하거나 예쁘지 않아도 다들 자신을 인정하며 잘 사는데, 너만 왜 그러는데? ’라는 말로 자신을 단속하려 했지만,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마음에 위안이 됐던 건 꼭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내 몸을 사랑하지 않으면 증오하거나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얼마나 단순하고 성급한 결론이었던가.

책 <몸의 말들>을 읽으며 찬찬히 나를 본다. 어떤 흐린 날의 풍경을 창 밖으로 보며 ‘오늘날이 흐리군’이라는 감정 없는 투로 내뱉는 혼잣말처럼, 거울 속 나를 응시하며 중얼거린다. ‘그냥 이게 나야. 나일뿐이야.’


책, 광고, 드라마, 영화 등 미디어에서는 늘 말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당신의 모습이 어떻든 당신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난 이 말을 완전 별로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날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 자체가 억압과 폭력이 된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는데, 내 피부도 몸매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을까. 받아들이고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금세 한심한 존재가 되어버리고, 그럼 또다시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책 <몸의 말들 중>


부정적인 감정이란 나의 노력과 의지의 영역을 벗어나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난다. 감정과 생각의 영역을 노력으로 조절하는 게 가능했다면 우울증이나 공황 장애,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많은 이들이 겪을 이유가 없다. 일어난 감정은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며 온갖 긍정적인 말들을 버무려 가장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차라리 내 얼굴과 몸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수긍하는 편이 낫다. 좋거나 싫다는 감정 외에 ‘온화한 수긍’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어찌하지 못하는 나의 몸과 일어나는 감정을 억누르고, 바꾸려 할수록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은 더욱 짙어진다. 별로거나 괜찮지 않은 내 모습에 대한 지나친 자의식을 갖지 않을 것. 창 밖 풍경을 관망하듯 감정의 프레임을 빼고 자신을 응시한다. 멋있거나, 예쁘거나, 또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감정의 폭은 그리 단편적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썩 나쁘지 않다거나, 큰 기복 없이 이어지는 보통의 상태도 있으며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대상에 대해선 무언의 끄덕임을 이어가며 ‘아 그렇군.’이라고 넘기는 무색무취의 감정도 있다. 난 내 얼굴과 몸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런대로 봐 줄만 하지라고 생각하는 일이 전보다 조금 늘었고, ‘뭐 어때 이게 나인 것을.’이라는 초연한 체념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자의식의 과잉은 곧 내 몸과 얼굴에 대한 기준과 잣대를 높인다. 내 몸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일어날 때, 그것을 부정하며 ‘안 돼, 그런 생각을 갖지 말자! 나를 더 사랑해야지.’라는 의미 없는 주문을 이제 더는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마음에 안 들긴 해.’라고 수긍하며 그 불평에 깊이 매몰되거나 분석하지 않고, 별생각 없이 넘기려 한다. 그렇게 넘기는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다 보면 다른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며 체중계 앞을 떠날 줄 모르던 내가 마음의 자유를 찾는 시간이 조금씩 더 길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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