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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제 허벅지가 뭐 어때서요


화장품 회사에서 에디터로 일한 적이 있다. 그 시기에 나는 아침마다 부지런히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었다. 규모가 큰 기업이 아니었지만, 코스메틱의 유행을 선도하며 감감적인 제품으로 소비자 층을 겨냥한 곳이었기에 사내의 분위기는 일정 정도 자신을 꾸밀 줄 아는데 능숙한 이들을 원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는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아침마다 풀세팅 상태였다. 아침 기상에 실패한 날에는 지하철의 덜컹거림 속에서 아이라인과 립을 그리거나, 화장실에서 맨 얼굴을 수습하고 사무실에 들어섰다. 동료들은 민낯으로 시선이 마주치면, 무안한 듯 안색을 붉히며 자신이 화장을 하지 않은 상태인 것을 자진해서 고백했다. ‘오늘 급하게 일어나서 민낯으로 왔지 뭐예요.’ 상대와 눈이 마주친 이유가 곧 자신의 민낯 때문이라고 믿는 듯했다. 그 회사를 다닐 적에 난 단 한 번도 화장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또 다른 회사에 근무하던 시기, 아는 동료는 말끝마다 자신이 살쪘다는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자진 신고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듯 제 몸을 ‘회사 생활에 찌들어 푸짐해진 여성’이라 규정하며 비하하는 모습에 유독 마음이 불편했다. ‘전 살이 좀 쪄서 ㅇㅇ씨 같은 옷은 입으면 안 돼요.’,‘이제 와서 살 뺀다고 외모적으로 달라질 게 있겠어요.’라는 식으로 말하던 그녀는 자신의 몸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 삼고 있지 않은 뉘앙스를 고수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외모에 관한 열등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녀의 회의적인 자기 비하는, 타인에게 외모나 몸에 관한 부적절한 농담을 들었던 경험에서 비롯된 자기 방어일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 또한 다른 이가 나의 외관에 대한 불편한 관심을 드러내는 일이 지레 겁이 나서 ‘전 원래 하체가 튼실해서 바지보다는 치마를 입을 수밖에 없어요.’ 라거나 ‘제가 원래 좀 남들보다 얼굴이 커서 앞머리가 없으면 안 돼요.’라는 말을 웃으며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약점을 먼저 드러내는 게 상대의 지적을 받는 일을 줄이는 방법이라 판단하여 앞질러 이야기했던 것이다. 민낯의 얼굴을 겸연쩍게 여기거나 자신의 몸에 관해 비하하던 동료 모두 불쾌한 과거의 지적으로 인해 자진하여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부끄러워하는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니었을까. 


 타인의 말은 내면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외모에 관한 지적은 자신을 규정화하도록 한다. 지나가듯 한 말은 내뱉은 자들은 기억 못 하지만, 들은 사람의 내면에선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민낯에 안경을 끼고 출근을 했던 날(각막이 충혈로 인해 렌즈를 낄 수 없던 날이었다.) 한 동료는 저녁 약속으로 인해 점심을 거르는 나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평소에 ㅇㅇ씨가 렌즈 낀 이유가 있었네요. 근데 설마 그 상태로 남자친구 만나는 건 아니죠?’ 마치 이 상태로는 연애 상대를 만나면 매력도가 곤두박질 칠 것을 확신하는 투였다. 그 외에도 비슷한 말들이 가만히 있는 전봇대에 들이받듯 마음을 툭툭 치는 일은 많았다. 치마를 입고 갔던 날에는 남자 이사 가 ‘넌 다 좋은데, 허벅지 살만 빼면 정말 좋겠어.’라는 묻지도 않은 조언을 건넸으며 ‘넌 운동한다면서 허벅지가 왜 그리 두껍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처럼 여성의 외모와 신체는 관찰당하도록 종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명희 작가의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에서는 여성의 외모를 향한 시선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현실에서 여성은 눈을 빼앗길 뿐 아니라 남성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또 그 시선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몸을 변화시킨다. 
김명희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근무를 할 때에 화장을 해야 한다거나, 두꺼운 다리를 소유하고 있으면 바지를 입으면 안 된다는 등 얼굴과 신체에 대한 까다로운 기준과 강박의 첫 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타인의 판단에서 온 경우가 많다. 비관적인 자기혐오 뒤에는 다른 이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야 한다는 압박과 그들이 남기고 간 말들이 알게 모르게 작용해 온 것이다. 화장과 몸매 관리를 단순히 자기 관리의 영역으로만 볼 수 없는 건, 원치 않는 날에도 오늘 먹은 칼로리를 소진하기 위해 러닝 머신 위에서 매일 10km 이상 달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가 내가 바랐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운동하지 않으면 먹을 자격이 없다는 죄책감, 아무것도 먹지 않은 공허의 상태가 아름답다고 여긴 건 자발적으로 생겨난 판단이라 할 수 없다. 이 생활이 행복하다면 상관없겠지만, 음식 앞에서 울고 웃으며 심판대와 같은 체중계 위에서 두려움에 떠는 일은 나를 피폐한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제품 뒷면의 칼로리를 보다 상품을 내려놓거나 곯은 배를 부여잡고 부엌에서 머뭇거리는 이들. 그들의 모습은 곧 나의 얼굴이다. 우리 모두 자신의 몸이 타인의 시선에 전시될 만한 적합한 기준을 갖춰야 한다는 암묵적 요구를 받아왔다. 누군가 무책임하게 찔러두고 간 말들은 가시가 되어 자신을 계속해서 공격했다. ‘넌 못생겼어.’, ‘살이 찐 여자는 매력이 없어.’,‘50kg이 넘으면 절대 안 돼.’라는 음성들. 그 목소리는 바이러스가 되어 내면에 스민다. 응시하는 타인의 시선이 사라지더라도 스스로가 24시간 작동하는 CCTV를 자처하게 된다. 이젠 내가 나 자신을 감시한다. ‘이걸 먹으면 넌 살이 찔 거야.’, ‘네 접히는 뱃살을 보고도 먹고 싶니?’, ‘넌 안쪽 허벅지 사이가 떨어지는 걸 원하잖아.’ 따위의 말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화장이 피부 건강을 돌보고 자기 개성을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자발적 수단이라면 뭐가 문제겠나. 그러나 각자의 신념과 행동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젠더 억압과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명희 <당신이 숭배하든 혐오하든>


다른 이가 만들어둔 기준에 스스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각인되면 마음은 황폐해진다. 판단의 기준을 누군가의 말에 의존하게 된 뒤에는 스스로를 믿고 신뢰하는 방법 또한 잃는다. 마치 위장이 약해서 식습관 개선에 조금만 부주의해져도 쉬이 속이 얹히는 사람처럼 연약한 내면은 누군가의 비난과 농담을 가장한 말에 상하는 일이 잦아진다. 이러한 끊임없는 비하와 검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서 재생되는 열등감과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들이 처음부터 나의 판단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자기 외모를 대상화하여 관찰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일상은 파괴된다. 외모와 몸에만 집중된 생활은 보이지 않는 시선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있다는 불안을 일게  하고, 음식에 대한 집착과 운동을 통한 칼로리 소모가 일상의 전부가 돼버린다. 죽을 만큼 지치고 피곤한 날에도 살이 찔 거라는 공포에 의해 꾸역꾸역 움직이는 고통, 말랐다는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여기며 갈구하는 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목표나  바랐던 꿈과 거리가 멀다. 내가 원한 건 체중계의 숫자와 먹고 싶은 과자의 칼로리가 500칼로리를 웃돈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 따위가 아니라는 것. 그 걸 아는 게 이 강박에서 벗어나는 첫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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