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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사랑받는 내 모습이 예뻤으면 좋겠다는 낭만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화면 속에는 어김없이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하여 자신의 매력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녀는 소탈함을 연기하고, 숨겨진 그녀의 매력을(숨겨진 게 아니라 대놓고 드러난) 알아차린 멋진 남성이 나타난다. 실제 그런 외모와 몸매를 갖춘 여성이라면 평범하게 사는 게 허락될 리 없다. 주택가를 혼자 산책하더라도, 커피를 먹으러 들른 카페에서도 끊임없는 주목과 관심을 받겠지. 그와 달리 지극히 평범한 여자의 생활이란 대체로 지루하다. 

 난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예쁜 외모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를 원했고, 많은 이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매력을 갖추고 싶었다. 그러한 열망으로 인해 중학생 시절부터 끊임없이 주변 친구들에게 질문했다. ‘난 미간이 너무 넓지 않아?’, ‘왜 내 얼굴은 이렇게 큰 걸까?’, ‘꼴사나운 토끼 앞니를 망치로 내려쳐서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어!’와 같은 말들을 내뱉으며 외모와 신체를 매스컴에 나온 여성들과 비교했다. 내가 선망하는 얼굴과 몸에서 벗어난 자신의 실체를 또렷하게 의식할수록 마음은 차갑게 굳어졌다. 

 난 예쁘지 않아, 키가 작고 통통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실현하게 된 건 대학 시절이었다. 난 수없이 많은 뷰티 정보와 다이어트 방법을 섭렵하며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못한 외형을 개선시키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남자를 만나면 머릿속에서는 끊임없는 불안과 예뻐 보이고 싶은 욕구가 작동이 불안한 스위치와 같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이성의 눈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내가 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어쩌지? 내가 지금보다 훨씬 늘씬한 몸매를 가졌더라면 더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그건 연애의 조건에도 여성의 외모가 작용하는 파이가 매우 크다는 믿음에서 기인했다. 실제로 내가 만난 남자들은 나의 얼굴과 몸매에 대한 평가를 자주 했고, 난 그 의견을 수긍하는 일에 익숙했다. 단 한 번도 그들의 첨언을 의심한 적이 없는 건 여성의 얼굴과 몸은 늘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게 자연스럽다는 의식이 내 안에서 작용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난 그간 외모의 이점을 가지면 타인에게 호의를 얻는 일이 유리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살을 빼고 나를 꾸미는 기술이 늘어갈수록 더욱 높아졌다. 

 그들은 나에게 호감과 애정을 드러내는 동시에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에 대한 감상을 되뇌듯 이와 같이 말했다. ‘넌 얼굴과 몸매 다 괜찮은데 키가 작은 게 흠이야.’,‘지금 네 얼굴에 키까지 컸더라면 나 같은 남자를 만났을 리 없지.’ 그 말들 앞에서 난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야릇한 불안을 느꼈다. 죽을 만큼 열심히 운동해서 살을 빼고, 외형을 가꾸어도 극복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걸 의식하자 무력감이 일었다. 그들에게 난 아름답지만 어딘가 완성도가 부족한 그림처럼 보인다는 것을 의식한 뒤로 더욱 체중 감량에 열중했다. ‘키도 작은데, 가로 폭까지 넓어지면 얼마나 더 볼품없을까! 짧은 건 극복하지 못하니까 외모라도 가꿀 수밖에 없다고 자조하며 기피하던 드라마 주인공에 스스로를 대입하여 달콤한 상상을 했다. ‘나도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갖고 싶어.’ 이와 같은 속삭임이 내면에 울렸지만, 그건 나의 음성이 아니었다. 모두 어딘가에서 들었던 타인의 판단으로 야기된 불안과 공포, 슬픔과 자조였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난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 최근 챌린지까지 이어지며 많은 사랑을 받는 화사의 솔로곡 ‘I Love my body’라는 노래에는 이와 같은 재기 발랄한 가사가 이어진다. 


살 빠졌네 안 빠졌네 그게 왜 궁금한 건데?
 반가웠던 맘 사라지게
 쓸데없는 인사치레
 Cause my body’s more than that
 질겅질겅 너의 그 입에 오르락내리락
 막 다룰 존재는 아냐


가사 속에서 드러나는 당당함은 매력적이지만, 난 내 모습에서 사랑스러움과 끝내주게 괜찮은 강점을 찾지 못했다. ‘날 사랑하든 안 하든 진짜 관심도 없다’고 말하는 걸크러쉬 함이 멋지다고 여기면서도 실상 내가 원하는 건 누군가 사랑해마지 않을 만큼 예쁜 얼굴과 늘씬한 몸매였다. 내게 ‘객관적으로 예쁘지 않지만 자존감 있고 당당한 여성.’과 ‘누가 봐도 예쁘고 몸매 좋은 여성’ 중 하나의 삶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의 몸을 택할 것을 알고 있다. 내 몸에 대해 갖는 의심과 불안은 중독과 같아서 한번 생기면 사라지지 않는다.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수양과 노력,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자는 다짐을 되뇌며 전보다는 나아졌다고 믿지만 여전히 난 갖지 못한 미를 열망한다. 불을 지피지 않은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머뭇거리는 중독자처럼 뇌리에는 ‘몸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베르그송이 ‘없다’는 ‘있다’보다 하나가 더 많다고 이야기했듯 난 몸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을 중단해야 한다는 생각과, 예쁘거나 몸매가 좋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하나 더 품고 있다. 내가 최종적으로 종착해야 하는 건, 이러한 자각 자체가 없는 것 (미에 대한 기준과 아름다움에 대한 바람)이리라. 

 그러므로 이 주제로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내가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문제에 대해 꺼내어 고백하는 건 하소연 밖에 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의식에서 벗어나는 과정 중에 이어지는 기록도 무가치한 건 아니라고 여기게 됐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처럼 음식과 다이어트라는 지독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고통받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거식증에 대한 치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캐럴라인 냅의 <욕구들>에서도 저자는 이와 같이 고백한다.


이제 나는 먹는다. 이 말 자체는 승리의 진술이지만, 음식과의 더 평화로운 관계-이는 당연히 내 몸과 나 자신, 나를 괴롭히는 것들과의 더 평화로운 관계를 의미한다-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빙빙 둘러가는 기나긴 길이었고(그렇지 않으면 좋았겠지만) 동행자들로 가득한 길이었다. (중략) 이제 나에게 좋은 하루란 고립과 완벽주의와 자기 징벌과 관련된 내 최악의 충돌들에 성공적으로 저항했음을 의미하고 그 대신 재미와 생산성과 연결성 사이에 적당한 균형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좋은 날들로 향하는 내 길을 찾기 위해, 더욱 힘을 북돋는 방식으로 안녕을 정의하기 위해 나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자주 고통을 참아가며 르누아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기어갔다. 충족될 자유를 향한 16년 간의 느린 걸음이었다.
캐럴라인 냅 <욕구들>


캐럴라인 냅이 거식증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뒤 그것을 회복하기까지 걸린 16년의 시간은 길고도 길다. 어느 정도 회복된 이후에도 완치란 개념은 없다. 과거의 지녔던 의식은 집요하게 이어져 어느 날 불쑥 ‘혹시 살이 찌면 어쩌지?’, ‘어떻게든 좀 더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속삭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기 때문. 그럴 때에 불안의 신호에 좌우되지 않고, 내 몸과 컨디션에 집중하여 좀 더 지혜로운 방향의 선택을 차곡차곡 쌓아가야 한다. 몸 외에 내가 몰입할 만한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상기하는 게 폭식과 음식 중독 상태를 오래도록 경험한 이들에게 중요하다. 


난 이 글을 통해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위한 지혜를 건넬 목적은 없다. 지금의 난 과거의 나와 비교했을 때, 폭식과 음식 중독 상태에서 완벽히 빠져나왔다고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내 안에는 불안의 씨앗이 남아있고, 이따금 그것들이 염증 수치와 같이 올랐다 내려가기를 반복하고 있으므로 조언을 건넬 입장이 못된다. 혈당 관리를 하듯 무의식 깊숙이 박힌 체중에 관한 불안과 음식에 대한 집착을 신중히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나와 유사한 불안을 안고 있는 여성들에게,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분투에 같이 할 동료가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난 차라리 내가 몸 없이 떠다니는 투명한 바람이나 그림자였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거울에 비치지 않는 완벽한 무의 상태라면, 이토록 외모와 몸에 대해 계속된 의식을 갖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현재의 몸에 대해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방법을 익히는 게 불행하지 않게 나이 들어가는 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이어간다. 


다니엘 페나크는 <몸의 일기>에서 10대부터 80대까지 자신의 몸의 변화를 집요하게 관찰하여 기록했다. 그 기록에는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근사한 몸이 아닌 그저 한 개체로서 생명력을 갖고 움직이는 육체만 존재한다. 다니엘 페나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루소가 산책길에 식물채집을 했던 것처럼 나도 내 몸을 채집하고 싶다. 죽는 날까지, 그리고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다니엘 페나크 <몸의 일기>


죽음을 앞둔 80대가 되었던 시점에서 남긴 말도 꽤 인상 깊다. 


내 몸과 나는 서로 상관없는 동거인으로서, 인생이라는 임대차 계약의 마지막 기간을 살아가고 있다. 양쪽 다 집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사는 것도 참 편안하고 좋다. 
다니엘 페나크 <몸의 일기>


몸에 대한 가치 평가 대신 존재에 대한 겸허한 인정과 수용이 담긴 문장에서 넉넉한 여유가 느껴진다. 나에게 몸이란 개조하거나, 바꾸어야 할 대상이었으며 사랑받기 위해 가꿔야 할 대상에 불과했지만, 몸에 관하여 자의식이 전혀 없는 저자의 태도는 나의 강박을 누그러뜨린다.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은 나의 불안을 잠재운다.  저자가 그러했듯 난 또한 몸에 관한 생각의 변화와 상태를 기록해나가고 싶다. 이 기록이 내가 몸에 매여서 겪게 된 불행에서 벗어나는 한 걸음이 되기를, 타인이 바라보는 관점과 기준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시선의 깊이를 키우는데 유의미한 글이 되기를 바란다. 비슷한 고민으로 몸을 혹사하기 바빴던 이들도 자신의 몸을 관조하기 위한 첫 의식으로 몸의 일기를 써보면 좋겠다. 아름다움을 가장하거나, 콤플렉스를 미화하기 위해 꾸며진 게 아닌 그저 실존하는 몸과 나에 관하여,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몰래 글을 써보자. 그 글이 어쩌면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는 내 마음을 구원하는 하나의 실낱같은 지혜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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