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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도망치고 싶은 어린 소녀를 만나야 해


밑 빠진 독처럼 불완전한 나를 보고 있으면 거슬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불균형한 얼굴과 뱃살, 두툼한 소시지처럼 불거진 팔뚝살, 조금의 여유 없이 꼭 붙은 허벅지. 하나하나 나열하기에 너무도 많은 불만 사항을 짚어가며 난 갖지 못한 아름다움을 갈구했다. 어떠한 조형미도 느껴지지 않는 몸을 안고 산다는 건 여자로서는 저주와 같지 여겨졌다. ‘나도 날씬한 몸을 갖고 싶어.’ 내 삶 전체에서 제일 중요하게 감각하는 건 음식에 대한 열의와 아름다운 몸에 대한 집착뿐이었다. 


 저마다 갖고 있는 결핍과 필요에 따라 시선이 가는 방향이 다르다. 머리 손질을 해야 할 시기에는 지나가는 여인의 윤기 흐르는 머리와 잘 정돈된 단발이 눈에 들어오고, 체중 감량 후 비키니를 입을 목표를 갖고 있으면 쇼윈도에 전시된 신상 수영복 앞에 걸음이 멈춘다. 내 관심은 보이는 아름다움에 있었고, 시선이 향한 건 다른 여성들이었다. 훤칠한 키와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길거리에서 보더라도 관심이 가지 않지만, 선망하는 미적 기준에 부합하는 여성을 발견하면 유심히 보았다. 과연 그녀가 갖고 있는 유려한 각선미는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신의 축복을 타고난 것인가. 탐욕적인 시선으로 훔쳐보며 감탄하다 끝내는 시기 어린 질투 뒤에 자기 비하를 이어갔다. 과연 난 먹고 싶은 음식을 어느 정도로 포기해야 저 여인과 같은 몸을 가질 수 있을까. 한쪽 뇌리에는 온갖 기름진 음식들이 즐비하게 떠오르는데, 반대편에서는 세상의 모든 음식과 담을 쌓고 생채소만으로 연명해야 만 할 것 같은 날씬한 몸의 흉상이 무너지지 않는 바벨탑과 같이 고고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체중에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몸매를 의식하며 관리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 넘어가기 애매한 순간이 종종 발생할 때도 있었다. 점심시간, 직원들과 어울려 식사하지 않고 빠지는 건 동료 관계에서 겉도는 이미지로 비치기 쉬웠다. 그러나 난 하루 한 끼만 먹는 간헐적 단식을 지켜야 했으므로 식사는 허용할 수 없었다. 팀원들이 점심으로 제육볶음과 된장찌개 중 무얼 먹을지 고민하고 있으면 난 파티션 사이에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혹시 나에게 ‘오늘은 ㅇㅇ씨도 같이 먹는 거 어때요?’라는 호의가 깃든 제안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홀로 의자 밑에 둔 운동화를 고쳐 신으며 정오가 되기 5분 전, 화장실에 가는 척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이 비워지면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운동 갈 채비를 했다. 내가 회사에서 짬짬이 진행한 운동은 계단 타기였는데, 1층부터 40층까지를 4번의 사이클을 돌며 오르내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비상구 계단에서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 시간만큼은 공간을 대관한 것 편하게 사용했다. 난 팀원들에게 점심을 먹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이어트 때문이라거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대신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점심을 먹은 후 가스가 심하게 차서 되도록 먹지 않게 됐다는 핑계를 댔다. 

 공개적인 다이어트를 하게 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이유를 되짚어보면,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나의 몸을 스캔하듯 훑으며 출력하게 될 생각을 의식했던 탓이다. ‘그렇게 다이어트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몸은 왜 그래?’ 라거나, ‘다이어트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셔야겠는데요.’ 등의 메시지가 드러나는 어투와 표정에 나는 곤두섰다. 때로는 실제 생각을 배려 없이 입 밖으로 내뱉는 이들도 있었다. 난 내 몸에 대한 타인의 가치 판단을 듣는 일이 수당 없이 야근을 하는 것보다 더 싫었다. 


식욕과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은 미적인 부분에 대한 열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에 관한 기준은 실제 내 의지로 생성하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매스컴과 타인의 판단이 작용하여 만든 잣대다. 미에 대한 열띤 관심을 자극하는 영상과 광고는 휴대폰을 보거나 길거리만 지나도 쉽게 접할 수 있다. 화면이나 광고 포스터 속 여인들은 마치 이 제품을 사용하기만 하면 완벽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는 듯 유혹적으로 미소 짓는다. 손톱만 한 알약 하나면 오늘 먹은 탄수화물과 지방을 배출해 줄 수 있다는 마법 같은 약속을 하기도 한다. 그녀들의 몸에 나를 대입하며 실낱같은 희망으로 결제 버튼을 누른 게 도대체 몇 번이나 될까. 이 제품이 다이어트의 고민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고 믿거나 이 립스틱이 나를 그녀처럼 고혹적으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을 몇 번이나 품으면서.

 타인이 요구하는 잣대에 억지로 나를 맞추려는 노력 뒤에는 굳건한 믿음-내가 살을 빼고 예뻐지면, 그 남자가 날 좋아할 거야, 내가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거야.-이 있었다.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다면 눈에 띌 만큼 아름다워야 했고, 내 존재 가치를 증명받으려면 우월한 외모가 절실했다. 


마리아노 우드만의 <섭식장애의 치료와 분석심리학>에서는 내가 느끼는 몸에 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료 방법을 이와 같이 제시한다. 


그녀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녀들의 몸에 쌓인 기억들을 깨닫는 것이다. 그녀들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멸절에 대한 두려움들은 그녀들의 불안과 권력 욕망을 보상하면서 뚱뚱한 몸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마링노 우드만 <섭식장애의 치료와 분석심리학>


과거의 어떤 시기를 들여다보면 꺼내보기 싫을 만큼 괴롭고 힘든 기억이 있다. 그 과거 에는 다신 내 삶에 들이고 싶지 않은 타인이 존재한다. 그들이 멋대로 내뱉은 폭력적인 말과 이죽거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허벅지는 좀 빼야겠다. 다리가 더 짧아 보이잖니.’, ‘얼굴형만 괜찮았으면 나쁘지 않았을 텐데.’, ‘생각했던 것보다 키가 더 작다. 굽만 보면 거의 이층 계단인데.’ 그 말들은 오래된 상자 안의 감추어두었지만, 숨겨둔다고 해서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 기억 속 음성은 내면이 연약해진 틈을 타 바이러스처럼 번졌다.  내가 문제 상황을 돌파할 힘이 없거나 도망치고 싶은 상황에 직면하면, 두려움은 엉뚱하게도 스스로를 공격했다. ‘내가 좀 더 키가 크고 날씬했더라면 이런 취급은 당하지 않았을 거야.’라는 식으로 판단을 흐리는 자조 섞인 열등감이 일었던 것이다. 그 후에는 자책하며 해결점 없는 결론을 내버렸다. 난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상황에 부딪히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확한 판단 대신 각고의 노력을 엉뚱한 곳(체중계의 숫자를 줄이기 위한 감량, 식사 생활)에 쏟는 데 열중했다. 

 뒤늦게나마 회피하고 싶은 기억을 마주 본다. 그 안에는 작은 체구의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소녀가 있다. 소녀에게 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몇 번이나 그런 광경을 떠올렸지만 미숙한 나는 상처받은 소녀를 보듬어줄 만한 너그러움이나 성숙한 지혜가 없었다. 그러나 한 번쯤 다시 붉어진 얼굴로 울고 있는 소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끝나지 않는 기억과 소거되지 않은 과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그 기억과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뒤에 내 안에서 무너진 자신만의 기준을 새롭게 세울 수 있다. 그간 아무런 경계 없이 외부에서 들여온 생각을 허물고 재배치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을 회복할 수 있다. 저자는 ‘수용이란 패배가 아니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서술한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모습과 약한 지점까지 인정하고 드러냄으로써 해방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난, 사랑받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뜯어고치고 싶었다. 나를 향한 타인의 무책임한 농담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완벽한 진실이라 믿었고, 인정 욕구와 결핍이 강해졌던 시기에 어김없이 내 체중은 고무줄처럼 급격히 늘었다 줄어드는 일을 반복했다. 43kg에서 53kg, 다시 45kg으로 회복한 뒤에도 안심하지 못하며 언제 살이 찔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시절은 끔찍한 암흑기였다. 여전히 난 그 시절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 어둔 그림자에서 조금 더 멀어지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1,2kg의 사소한 변화에 비정상적으로 상승과 하향 곡선을 그리는 불완전한 감정 상태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너 좀 살이 붙은 것 같다.’라는 누군가의 말에 그날 저녁부터 다이어트에 돌입하는 강박적인 실행력을 제어하기 위해 말이다. 

 다이어트 강박과 몸에 대한 혐오감은 한두 번의 노력으로 완치되지 않는다. 컨디션과 생활에 따라 이 감정은 변화하는 염증수치와 같이 오르내린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로 인해 절망해야 하는 건 아니다. 과거 기억과 타인의 말에 기인한 불안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인지하면 몸에 대한 혐오와 강박에 몰입하지 않을 수 있다. 내 생활 전반에 관한 불만족과 결핍을 외적인 문제로 전환시켜 회피하려 했던 것을 의식하게 되면 ‘난 너무 뚱뚱해.’라는 생각에 과몰입하여 자신을 지나치게 폄하하여 불행으로 몰아넣는 실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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