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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비니야 Oct 22. 2023

평범한 게 싫었던 때


정한아 작가의 ‘친밀한 이방인’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안나>. 이 작품의 헤드 카피인 ‘갖고 싶은 이름, 훔치고 싶은 인생’이라는 문장이 뇌리에 각인됐던 건 만족스럽지 않은 내 모습에 대한 열띤 자책 때문이었다. 내 외모와 몸에 대한 환멸 어린 자책 뒤에는 누군가의 삶을 도둑질하거나 맞바꾸는 상상을 했다. 마치 유미가 가난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나의 신상 정보를 훔쳐 새 삶을 살아갔던 것처럼. 난 허물을 벗듯 ‘있는 그대로의 나’를 버리고, 누군가의 아름다운 용모와 교체하여 새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다.


안나에 관한 감상 댓글 중 기억에 남는 글이 있다.



현실에서는 수지 정도 외모면 무조건 잘 될 수밖에 없음. 예쁜 외모와 몸매도 능력이기 때문에 그런 훌륭한 외관을 갖추고 있는 걸로 뭐든 다 할 수 있고 성공 가능.



만약 유미라는 인물이 실존하며 수지만큼 예쁜 외모를 갖췄다면 극 중에서 겪은 위기는 경험하지 않을 거라는 댓글에 수천 개의 좋아요가 달렸다. 그 내용만 봐도 이 사회에서 아름다움은 유리한 능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난 아름다운 외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열띤 부러움을 품속의 알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 시작은 10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생 때부터 외모에 대한 불만은 갖고 있었다. (난 미간이 지나치게 넓고 얼굴에 균형감이 없으며 옆 광대가 과도하게 돌출되어 있었다. 거기다 다른 치아에 비해 눈에 띄게 큰 앞니가 거슬렸다. 작은 키에 비해 하체가 비대하게 두껍다는 사실도 이때부터 알고 있었다.)

 20대가 된 뒤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외관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온갖 화장품을 사서 콤플렉스를 개선할 수 있는 메이크업 방법을 배웠고, 다이어트 약과 시술 정보를 찾는데 열중했다.

 근본적으로는 나의 몸 뚱아리가 문제였다. 난 내 몸을 내려다보며 ‘뚱아리’라고 칭했다. 수년간 군것질로 단련된 몸에는 체지방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살을 빼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지금 모습을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확신을 가졌던 23살, 운동을 시작했다. 하복 밑으로 드러난 나의 팔뚝살을 보며 ‘넌 키는 안 자라고, 먹은 게 전부 팔뚝으로 가나 봐.’라고 말하며 히죽 거린 동급생의 말을 곱씹으며 다이어트에 에너지를 쏟았다. 이 시기에 난 식후에 챙겨 먹던 과자와 라면을 끊고 매일 한 시간씩 줄넘기를 했다. 그 외에도 요가와 필라테스, 홈트레이닝을 병행하며 내 몸에서 살을 몰아내는 열띤 전쟁에 최선을 다했다.

난 52kg에서 42kg까지 10kg을 감량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 변화 뒤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후유증이 잇달았다. 운동에 대한 지식이나 몸에 대한 이해 없이 무작정 이어간 활동은 무릎의 무리를 주어 물이 찼고, 머리가 빠지면서 탈모가 왔다. 여러 음식에 제한을 걸자 식욕은 폭발적으로 늘었으며 고열량 식품에 대한 열망은 심화되었다. 난 매일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만 열중했다. 하루에 한 끼. 먹고 싶은 것을 먹되 저녁 9시 이후에는 야식 금지라는 규칙을 수행해 나갔다. 그 규칙이 생긴 후로 매일 단 한 번의 소중한 기회가 오면 어떤 음식을 먹을지 고민하는 게 삶의 낙이었다. 식단 관리를 하게 된 뒤로 마트에 진열된 음식들이 나를 현혹하는 간악한 마녀처럼 여겨졌다. 그간 의식하지 않았던 제품 뒷면의 칼로리를 살피고, 300 kal라는 극악할 만큼 높은 칼로리에 좋아하던 과자를 몇 번이나 내려놓으며 ‘먹고 싶다’,‘먹으면 안 돼.’라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욕구불만 상태로 가학적인 다이어트를 이어가는 원인에 대해 캐럴라인 냅은 이와 같이 설명한다.


식욕에 관한 세세한 사항들-칼로리, 먹는 분량, 몸으로 들어가는 것 대비 소비되는 것, 구두, 헤어스타일, 강철 같은 복근-에 심히 치우친 불안한 집중은 욕망과 관련한 더 크고 더 공포스러운 질문들을 흐릿하고 초점에서 벗어난 상태로 유지해 준다. (중략) 영혼보다는 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더 쉽고, 문화가 여자들에게 제시하는 좁은 정체성의 틈새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것이 처음부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쉬우며, 사회적으로 승인된 욕망의 제단에서 예배하는 것이 모든 열정의 표현과 모든 욕구의 만족까지 고려해 자신만의 제단을 건설하는 것보다 쉽다.
캐럴라인 냅 <욕망들> 중


즉, 열중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음에도 직면하는 것이 두려울 때, 인간은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내가 외모와 몸에 대한 불만을 개선하는 일에 집중하는 건, 당장의 바람대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서울로 독립하여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보다는 수월하게 여겨졌다. 캐럴라인 냅은, 몸매에 대한 열띤 관심, 끊임없는 자기 파괴적 질문들이 그 사람의 본래 진심- 내면의 이야기를 가린다고 말한다.  

책에는, 체중 감소가 목표이자 성취인 여성과의 인터뷰가 기재되어 있다. 인터뷰어는 여성에게 음식과 체중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 것 같냐고 묻는다. 질문을 받은 여성은 잠시 말문이 막혀 있다가 얼떨한 표정으로 말한다. 몸무게를 의식하지 않고, 거울에 드러나는 허리 라인을 전혀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다고.

 이 질문을 나 자신에게 건넨다면 어떠할까. 나 또한 인터뷰에 참여한 여성의 고백처럼 다이어트와 체중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상황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이어트를 평생의 숙제로 안고 가게 된 뒤로 운동과 칼로리에 대한 계산이 매초 매분마다 자연스럽게 작동되고 있었다. 이 기능이 중단되는 건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만약 이런 의식을 하지 않고 자유로이 먹고 마시게 된다면,  나의 허기는 금지된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제 삼의 몬스터처럼 집체만 한 식욕을 발작적으로 일으키지 않을까? 충동적인 식욕을 제어할 능력을 상실한 뒤의 나는 결국 혐오하는 몸매를 갖게 될 거라는 최악의 상상이 이어졌다.


이 불안은 캐럴라인이 언급한 대로 ‘손에 잡히는 분명한 형태의 위안을 갈망하도록’ 만든다.

달콤한 케이크와 초콜릿을 통해 허기를 달래거나 나를 아름답게 만들어줄 거라는 확신을 주는 다이어트약과 아름다운 옷, 화장품을 사는 행위로 일순간 위안을 얻은 뒤에는 그 행동이 온전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자책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위안을 얻기 위한 행동 뒤에 남는 건 괴로운 죄책감이다. 난 내면의 불안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먹었던 브라우니와 치즈 케이크를 소모할 목적으로 공원을 뛰거나, 다이어트 보조제와 화장품을 사느라 과소비한 카드 할부금을 되갚는 일을 지속했다.

 혹독한 다이어트로 감량에 성공했지만 나를 행복하지 않았다. 요요 없이 2년 간 감량한 체중 상태를 유지하던 시절에도 시종 ‘살이 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난 두려움이라는 감시자에게 식단을 검열받았고, 어느 날은 억눌렀던 식욕이 봇물처럼 터졌다. 그런 날에는 잠잘 시간도 포기한 채 네 시간 동안 운동을 하거나 칼로리를 소모하기 위한 무의미한 행동을 몸의 피로를 무릅쓰고 이어갔다.


난 무엇을 위해 그런 노력을 이어갔던 걸까?  내가 살이 찐다고 해서 주변에서 비난을 하거나, 아랫배가 접힌다는 것에 대해 조소하는 이가 없는데도 다이어트에 대한  열망은 계속됐다. 돌아보면 이십 대 초반의 난 생활하면서 행복과 만족을 얻은 경험이 거의 없었다. 몸뿐 아니라 나의 일상 전체가 고장 난 프레임처럼 여겨졌다. 달콤한 간식을 먹으며 비루한 삶을 잠시 잊을 수 있었고, 재미있는 영상에 매몰되어 자신을 위로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 대학 졸업 이후의 삶에 대한 계획은 막연했고,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이룰 실행력과 재능도 없었다.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들과 내 모습을 비교하며 느끼는 초라함은 내면에 어두운 그림자를 생성했다. 어쩐지 난 앞으로의 삶이 바랐던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향할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며 초조해졌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드라마나 영화 속 로맨스를 관망하며 과자봉지를 비우는 일도, 번번이 공모전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에 좌절하며 스크랩해 둔 채용 공고에 복붙 한 내용의 입사지원서를 보내는 매일의 습관도 잘못된 일처럼 여겨졌다. 당시에 난 내가 무언가를 바꿀 힘이 없다는 무력감에 압도되었다. 자신을 믿을 수 없었고, 환경적인 조건이 열악하다는 불만으로 가득 차올랐다. 엉망인 상황에서 그나마 바꿀 수 있는 건 내 몸뿐이었다. ‘이 몸이라도 어떻게든 개조해야 해.’ 졸업 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있던 시기, 난 자신을 학대하는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체지방이 쌓여 있는 아랫배와 허벅지, 팔뚝을 혐오하듯 보며 벼린 칼로 두터운 지방층만 예리하게 잘라내는 상상을 했다. ‘넌 먹어선 안 돼, 매번 만족스럽지 않다는 말만 하지 말고 네 몸이라도 변화시켜 봐.’ 내면에서는 신랄한 명령이 이어졌다. 난 그날 이후 지금까지 거의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운동하고 먹고 후회하는 일을 반복했다.


고혈압이나 당뇨, 동맥경화증 등은 생활 습관 병으로 분류된다. 발병 후 일상 전반을 돌아보고, 그 패턴을 바꿔야만 개선될 수 있지만 수십 년간 반복했던 행동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다이어트 강박도 이러한 병들과 비슷한 속성을 띤다. 음식 중독과 두려움이 인식 깊숙이 자리하면 단번에 뿌리 뽑는 일은 어렵다. 현재도  음식에 관하여 지나치게 예민한 감각을 자제하려는 마음을 갖지만 내면에선 식사 후에 당장 10km를 달려서 칼로리를 소모하지 않으면 살이 찔 거라는 무서운 속삭임이 들리기도 하고, 두둑하게 먹은 날에는 죄책감에 화장실 변기에 먹었던 것을 전부를 게워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런 감정이 드는 날에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 게 좋을지에 대해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애쓴다. 죄책감을 갖는 대신 맛있게 먹던 순간의 만족을 떠올리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운동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들면 무리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인다. 몸 상태에 대한 의식 없이 가학적인 운동을 하지 않으려 약간의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다. 물론 은밀하고도 똑똑한 내면의 두려움은 더욱 디테일한 불안으로 나를 움직이도록 만든가. 난 이 감정을 관리하는 일에 기민한 감각을 계속해서 세워야 한다. 다이어트 강박은 잠시 수그러들 순 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질병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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