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에서 멈추어 생각하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습니다.
신호가 바뀌고, 보행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60초.
순간 ‘이거 꽤 긴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이라면 이 정도 거리면 30초도 안 줄 거 같은데 말입니다.
덕분에 여유롭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를 거듭해서 건널수록 이상했습니다.
단순히 숫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60초라는 시간이, 마치 사람을 기다려주는 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우리 동네에 있는 횡단보도는 훨씬 긴 거리인데 시간은 겨우 30초입니다. 천천히 걸을 수는 없는 시간입니다.
대만은 느린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AI 반도체의 심장, TSMC.
애플도, 엔비디아도 이 기술에 의존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 사이 외교 전의 중심에 놓여 있기도 합니다.
첨단을 달리고 있는 이 나라가
보행자에게는 충분한 시간을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
그 모습이 저에게는 참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빨리빨리 문화는 이제 설명조차 필요 없는 상식이 되었고,
인터넷도, 회의도, 배송도, 습관도 모두 로켓 같은 속도로 움직입니다.
속도는 능력이 되었고,
효율은 미덕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온 동시에
누군가를 점점 더 소외시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낮 시간대 외근을 하며 지하철을 탄 적이 있습니다.
객차 안은 대부분 어르신들이셨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환승 구간을 오가며,
다음 열차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분들도 더 빠르게 움직이고 싶으실 텐데.”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따라주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나오는 소리는
‘출입문 닫습니다.‘
라는 안내입니다. 아직 사람은 내리지 않았고, 어르신은 이제 타보려고 하시는데 출입문을 닫겠다고 합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그 느린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속도에 익숙한 세대의 표정이었습니다.
때때로 그 표정이 말보다 더 큰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몸도, 속도도, 반응도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잊고 사는 사회는,
너무 빠른 속도로
서로를 놓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느린 사람을 위한 사회,
그리고 언젠가 느려질 우리 자신을 위한
세상의 속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타이베이의 신호등은 그렇게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60초를 줘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효율적인 당신보다는 당신의 존재가 더 소중합니다.”
기술의 최전선에 있으면서도
사람을 먼저 건너게 하는 도시.
그 도시의 풍경은 저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겼습니다.
속도가 선이라는 믿음
과연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 걸까요?
질문은 지금도 제 마음속에서 느리게 조용히 깜빡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