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원짜리 이발
아들의 머리가 제법 덥수룩 해졌다. 한국에서 오기 전에 이발을 하고 올까 하다가, 그때는 약간 "베트남이 싸니까, 거기 가서 하지 뭐"병이 있어서 뭘 하든 다 미룬 탓에 이곳에서 새롭게 해야 할 미션이 또 하나 생긴 셈이다.
사실 집 앞에 한국어로 된, 한국간판의, 한국사람이 하는 미용실도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 외국어로, 외국인으로로 지내는 이곳의 삶이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2-3배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한국미용실을 갈 필요가 없겠다 싶어, 로컬이발소를 찾아보기로 했다.
이왕 로컬에서 이발하는 거 성시경의 먹을 텐데에 나오는 '길거리이발'같은 거 한번 해볼까 싶어 아들에게 영상을 보여줬다. 사실 딸이면 머리가 망칠까 봐 염려가 되긴 하지만 아들내미 머리야 3-4주에 한 번씩 이발을 하니 실패하더라도 한 달만 참으면 됐고, 망치더라도 추억 아니겠느냐 이야기하니, 이러나저러나 별 상관없는 아들은 그러쟈고, 선뜻 오케이를 해주었다.
그렇게 길거리에서 이발을 시켜보고 싶은 희한한 엄마덕에 하교 후에 이발소가 아닌, 길거리로 이발을 하러 나섰다. 요즘 호찌민에서는 트럭바버샵이 유행이라 여기저기 몇 군데가 있는데 마침 집 근처에 있다는 동생의 제보로 굳이 집 앞의 미용실을 놓고 그랩을 타고 길거리로 나섰다. 나 참 별나다 별나.
해도 이쁘게 지고 있겠다, 바로 앞에 몰도 있어서 끝나고 저녁 먹고 들어가면 되겠다 다 좋았는데 이 동네 배수에 문제가 있는지 우리가 내린 몰 바로 앞에 있는 바버트럭까지 길이 물에 잠겼다.
익숙한 듯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오토바이들 사이에서 나와 아들, 딸은 얼음이 되어버렸다.
나는 작은 모험심이 발동거렸지만, 청결을 유지해줘야하는 아이들의 엄마로써는 선택의 문제였다.
이 범람하는 물에 발을 담기고 이 길을 건너 저 트럭바버샵을 기어이 갈 것이냐,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쾌적한 몰에 들어가 편안한 미용실을 갈 것이냐.
"애들아 어떻게 할까? 이거 건널까 말까" 하고 물었는데 제주도 말똥밭에서도 뒹굴고 놀았던 우리 아이들이 저까짓 범람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었다. 재미의 대상이면 대상이겠지.
"엄마 가보자 ㅋㅋ 재밌을 거 같아" 역시나 내 자식들이다.
트럭바버샵 주인과 눈이 마주쳐 어떻게 방법이 없느냐 구원의 눈빛도 보내봤지만, 그는 씩 웃는다. 그냥오란뜻이지 뭐.
그렇게 모세의 기적도 아니고 오토바이가 지나다니는 물길을 헤치고 나아가 끝내 이발하러 왔다. 서울이었다면 절대 안 했을 짓이었다.
여간하면 몸짓발짓으로 그간 모든 대화를 해왔지만, 머리를 어떻게 잘라달라고 요청할지 설명하려다 이상한 춤을 추듯 될 것 같아, 처음으로 구글번역기를 꺼내 "깔끔하게 잘라주세요"라고 보여주었다. 살짝 피식 웃더니 알겠다고 신호를 해줬다. 나중에 보니 사실 요청사항이라는 게 의미가 없는 게, 그냥 알아서 잘라주는 게 이 집의 룰인 듯했다. 투블록 해달라고 안 한 게 참 다행이었지.
그렇게 볼 때마다 답답했던 아들의 머리카락이 현란한 가위질을 거쳐가며 시원하게 떨어져 나갔다. 생각해 보니 이 장면을 보는 게 꽤 오랜만이었다. 초등학교 가고 나선 늘 아빠와 같이 이발을 하러 갔고 좀 크고 나선 혼자서 미용실을 다니기 시작했어서 내가 보호자로 같이 가준 게 언제가 마지막인지 잘 떠오르지 않더라. 오랜만에 이렇게 다 큰 어른처럼 이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새로웠다. 너 이 자식, 처음에 애기 때 이발시킬 때는 내가 안아주고 이발하고 울고불고 그런 거 아니.. 혼잣말이 할머니처럼 나왔다.
군더더기 없는 손질이었다. 앞, 옆, 아래, 위 적당한 길이로 적당한 스타일로 금세 잘 다듬어주었다. 이발해 주는 청년도 많아봐야 30살도 안되어 보여서 그런지, 적당히 어울리게 적당히 요즘 느낌으로 잘 만들어주었다.
처음에는 긴장한듯한 아들도 점점 마무리되는 머리가 맘에 드는지, 엄지를 내게 보여준다.
순식간에 이발을 마무리되고, 스펀지로 목덜미 머리카락을 터는 사장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6만 동이란다. 머리가 잠깐 멍해진다. 6만 동??? 3천 원???
내가 한국에서 앞머리를 3분 만에 자르고 3천 원을 낸 적이 있는데 말이야. 이 현실성 없는 가격 혹은 인건비 오늘 또 한 번 놀래는 하루다. '엄마 돈 굳었으니까 우리 이걸로 편의점 가자!'라는 말에 그 감흥도 금방 깨어져 버렸지만.
예쁘게 잘랐다는 것보다 3천 원으로 주고 이발했다는 게 감탄스러운 아들은 연신 머리를 만지며 만족해한다. 이제 5학년이 올라가는 아들은 확실히 동생보다는 이곳에서의 생활에서 바라보는 것과 신기해하는 것들이 좀 달랐는데 그중에 하나가 물가였다. 단순히 싸다의 개념이 아니라, 이곳이 싸면 이곳에서 뭘 사 와서 한국 가서 팔면 이득이겠네?라는 류의 발상이라던가, 나라별로 화폐가 왜 다른지, 혹은 이나라는 화폐의 단위가 왜 이리 큰 건지 등등 세분화되고 깊이 있는 궁금증이 많아졌다. 분명 why나 이런 책에서 나라의 물가나 화폐등을 접했었겠지만 단순히 배우는 정보는 인식으로 끝나지만 , 와서 보고 느끼는 정보는 더 많은 사고를 요구케 하는 것 같다. 여하튼 계산봇처럼 모든 금액을 한국돈으로 계산해보는 습관이 생긴 아들덕에 나는 귀찮은 베트남 동->한국 원으로 변환하는 두뇌는 거의 사용하지않고 살수있었다.
그나저나 몰로 돌아가려면 우리는 이 물길에 한번 더 발을 담가야 한다. 올 때의 찝찝함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담그는 일은 두 배의 용기가 필요했다. 나도 아들도 사실 이미 슬리퍼가 너덜너덜해서 바꾸려던 참이었기에 우리 이거를 건너고 몰에 가서 새 슬리퍼를 하나씩 사자, 하고 마음에 마취를 한 뒤 다시 그 길을 건넜다. "베트남 가면 싸니까 거기 가서 사지 뭐"리스트에 있었던 내 슬리퍼도 오자마자 사려고 했는데 자꾸 미뤄져서 정말 너덜너덜의 극치가 되는 중이었는데 덕분에 더 이상 미루지 않고 슬리퍼를 살 이유가 확실해졌다.
젖은 슬리퍼를 툭툭털고 몰에 들어오니 아이들이 맥도널드가 먹고 싶다고 한다. 이곳에 온 지 어언 일주일째, 하루에 두 끼 혹은 그 이상을 한식이 아닌 음식을 먹으니 아이들도 익숙한 음식이 그리웠나 보다. 나도 꽤나 반가운걸 보니 이쯤 되면 맥도널드도 한국전통음식이 아니던가 싶고.
크리스마스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맥도널드에서 생일파티도 하고, 모임도 하는- 겨울만 아니었지,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맥도널드에서 보내는 첫 번째 금요일 밤이었다. 베트남에 있는 학교에 등교하고, 길거리에서 머리를 자르고, 똥물에 발도 담그고, 망고를 하루에 3개쯤 먹는, 꽤나 잘 적응된 한 주를 보낸 우리를 위한 불금이기도 했다. 특별히 옛다 기분이다! 싶어 맥도널드를 먹고 오락실로 올라가 5천 원어치의 동전을 바꿨다. 애들에게 '이발비가 3천 원인 거 생각하면 5천 원은 엄청 큰돈이란다' 생색 한번 내주고.
방방 뛰며 둘이서 어찌나 신이 나하던지. 나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여기의 오락실 토큰시스템을 생존적으로 간파한 애들이 금액의 분배, 전략적인 지출, 효율적인 토큰교환까지 척척 해나가는 모습이 하찮다가도 귀엽고 이곳에서 둘이 좀 더 서로를 위하고 의지하고 돈독해지는 게 보여서 흐뭇하기도 했다.
한 끗 고조된 아이들이 집에 오는 길에 '엄마최고' 라며 쌍따봉을 날려준다. 어찌 되었든 번거롭게 머리를 자르러 온덕에 비록 똥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결국 슬리퍼는 못 샀다) 길거리에서 머리도 잘라보고, 오랜만에 맥도널드도 가고, 오락실에서 실컷 놀아서 너무 재미있었단다. 이날을 못 잊을 거란 과장까지 보태서.
하긴 나도 그렇지만 오늘 트럭에서 이발한 일, 똥물에 발 담근 장면은 아마 베트남을 기억하는 몇 장면중 기억남는 하나로 남을 것 같다.
오늘도 이렇게 기억이 될뻔한 시간을 추억으로 건져 올렸다. 추억은 수혜가 아니라 성취였음을-
똥물에 발을 담가보고서야 알게된다.
그나저나, 나..슬리퍼..이제 진짜 버리고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