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판엔 내가 묵을 낼게. 넌 뭘 낼래?

조르주 쇠라의 <Les Poseuses>와 어빙 고프먼의 자아들

by 이태이
여자 모델들.jpg


조르주 쇠라의 <Les Poseuses>는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절충적인 작품이라는 평이 일반적이다. 세 명의 여인이 누드로 포즈를 취한다는 점과 그 셋의 구도가 삼각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고전주의를 느낄 수 있다. 후경의 왼쪽 절반을 쇠라 본인의 대표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로 채웠다는 점, 그림 전체 기법이 점묘법이라는 점에서는 모더니즘적인 특성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작품을 읽을 때 서로 다른 두 가지 주제를 나열하기만 한 병렬적인 해석에 만족해도 괜찮을까.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인간의 자아를 '무대 위의 나'와 '무대 뒤의 나'로 나누어 분석했다. '무대 위의 나'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의 나, 사회 규범과 역할에 충실한 나를 일컫는다. '무대 뒤의 나'는 사회 관계에서 벗어난 온전한 개인으로서의 나를 뜻한다. 직장에서의 나, 시민으로서의 나, 동호회에서의 나 등은 모두 '무대 위의 나'이다. 반면 집에서 혼자 침대에 누워있을 때만큼은 '무대 뒤의 나'가 될 수 있다.


이 도식을 위 그림에 대입해 보면,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엉뽕을 한껏 넣어 차려입은 여인의 모습은 '무대 위의 나', 그 그림 앞에서 나체로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여인들은 '무대 뒤의 나'로 읽을 수 있다. 전자는 인위적인 모습=가짜, 후자는 자연스러운 모습=진짜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주식 차트가 하나의 그림이라면, 그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세력이다. 차트를 분석하는 개인투자자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이다. 그 관객은 차트에서 인위적인 부분과 자연스러운 부분을 찾으려 노력한다. 인위적인 부분이란 세력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나타나는 모습을 일컫는다. 반대로 딱히 세력의 큰 개입 없이 전체 투자자들의 매수/매도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차트에서 표현되는 것들을 그와 같이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고프먼이 말한 대로 나라는 인간은 칼로 두부 자르듯 '무대 위의 나'와 '무대 뒤의 나'로 나눌 수 있을까. 후기산업사회 이후로 오면서 그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졌다. 가령 우리는 쉬면서도 SNS에 셀카를 올리고 멘션에 나의 감정을 끄적인다. 이것은 무대 '위'에서의 모습일까 '뒤'에서의 모습일까. 일반적으로 '무대 위의 나'를 사회적 자아, 후천적 자아로, '무대 뒤의 나'를 본능적 자아, 선천적 자아로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가 본능이라든가 선천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마저도 다분히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이후의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걸음걸이는 어떤가. 인간의 걷는 모습은 본능일까 교육일까. 이에 대한 연구를 참고하면 인간은 걷는 모습마저도 생물학적 본능보다는 후천적인 교육과 사회화 과정이 상당 부분 개입함을 알 수 있다. 그 예로 조선 시대 사람들의 걸음걸이와 대한민국 국민의 걸음걸이는 매우 다르다. 근세 일본인의 걸음걸이와 유럽인의 걸음걸이도 다르다. 같은 조선에서도 양반의 걸음과 평민/천민의 걸음조차도 달랐다.


과연 우리 인간에게서 순수한 본능이라는 걸 포착할 수 있을까. 마치 원석에서 순도 100%의 금을 정제하듯 인간의 양태에서 순도 100%의 본능을 건져낼 수 있을까. 우리가 '자연'이라 믿는 부분마저도 실은 상당 부분 사회적인 레벨이 섞여 있음을 의심해야 한다. 먹고 싸고 자는 것 자체는 본능이지만,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어떤 자세로 어떻게 싸는지 등은 문화적인 영역이다.


다시 쇠라의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쇠라는 그러한 <자연 : 문화>라는 이분법이란 허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화가 앞에서 나체로 포즈를 취하는 여인들은 과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일까. 아니다. 누드 모델의 포징 자체도 실은 대단히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산물이다. 모델 교육을 받고 직업 모델이 되어 화가와 계약 후 요금을 지불 받고 화가의 요청대로 포즈를 취하는 것은 철저히 '무대 위의 나'에 해당한다. 일요일 오후에 피크닉을 가기 위해 한껏 차려 입은 여성도, 화가 앞에서 생물학적 몸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여성도 모두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다. 쇠라는 그 두 여성을 하나의 화폭에 그림으로써 둘의 입지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화가의 의도이듯, 여성에게 옷을 벗긴 것도 화가의 연출이다.


성을 sex와 gender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허구이며, 우리가 sex라고 믿는 부분마저도 실은 gender임에도 마치 그것을 sex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 시대의 이데올로기라 고발했던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와도 상통하는 맥락이다.


다시 차트로 돌아가자. 차트가 그림이고 세력이 화가라면, 차트라는 그림의 모든 부분은 화가인 세력의 의도라고 읽어야 한다. 다만 이렇게 나눌 수 있겠다. 의도대로 잘 표현된 부분이 있고 의도대로 표현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림은 틀리면 덧칠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새로 그릴 수 있지만, 차트는 시간이 지나면 되돌리지 못한다. 실수마저도 캔들의 꼬리로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의도한 부분은 세력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부분과, 개인투자자를 유혹하거나 겁주기 위해 거짓 연출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보통 매집봉이나 거래량을 통해 알 수 있고, 후자는 맥락을 벗어나 갑작스레 나타난 캔들이나 급등, 급락, 혹은 위꼬리나 아래꼬리가 매우 긴 캔들 등에서 유추할 수 있다.


세력은 개인투자자를 유혹하고 공포에 빠뜨려 궁극적으로 이익을 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그려지는 차트라는 그림은 철저히 인위적인 의도가 담긴 결과물이다. 세력은 개미들이 늘 보고 있다는 가정 하에 주가를 움직이고 거래량을 만든다.


그렇게 보면 세력은 상위 포식자에, 개인투자자는 초식 동물에 빗댈 수 있겠다. 초식 동물인 개인투자자는 늘 상위 포식자인 세력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해 있다. 피식자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지금은 다행히 천적을 피했지만 다음 번에도 지금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음 또 다음. 그러다가 언젠가는 잡아먹히고 마는 운명 아닐까.


자연에서 곤충이나 동물 등은 천적을 피하기 위해 변장, 위장, 위협 행동을 취한다. 그중 특이한 행동 중 하나가 죽은 척하기이다. 천적의 입장에서는 먹이가 죽기를 바란다. 도망가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있기를 원한다. 그런 점에서 죽은 척하기는 오히려 천적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제스처이다.


그런데 의외로 꽤 많은 경우, 먹잇감이 먼저 죽은 척하면 천적은 당황하며 포식 행위를 중단하고 떠나버린다. 죽은 척하기란, 피식자 쪽에서 결과 값을 먼저 선취하는 전략이다. 상대가 의도했던 모습을 내 쪽에서 먼저 취함으로써 상황을 역전시키는 묘수이다.


인간도 동물과 같다. 인간도 변장, 위장, 위협을 통해 생을 건사한다. 미술 작품 또한 대표적인 변장 또는 위장이다. 19세기 이전의 미술 작품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교회를 장식하거나 상류층의 집을 꾸미는 데 쓰이는 수집품의 일환으로 이해됐었다. 화가들은 돈을 받고 의뢰인이 그려달라는 대로 그려주는 기능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그려야 했다.


그런데 19세기가 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무엇을 그릴지 어떻게 그릴지 화가들은 스스로 생각해서 정했다. 단순히 디스플레이용 장식품이었던 미술이 화가의 목소리를 내는 매체로 변한 것이다. 객체였던 미술 작품이 주체가 되었다. 이제 관객만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작품도 관객을 보게 되었다. 이는 마치 세력이 아무 생각없이 되는 대로 차트를 그리는 게 아니라, 개인투자자들을 매혹하고 속이기 위해 모종의 의도대로 차트를 만들어가는 것에 빗댈 수 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관찰하면서 관찰되는 존재이다.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치장한다. '무대 위의 나'로 변신한다. 이 지점이 동물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점인데, 동물의 치장은 철저히 본능의 영역이기 때문에 기계적이며 따라서 변주가 불가능하다. 반면 인간의 치장은 사회적 영역이기 때문에 수많은 변주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치장을 할지, 즉 나라는 존재를 '무대 위의 나'와 '무대 뒤의 나'로 나누고, 어떤 부분을 '무대 위의 나'로 택하고 연출할지는 철저히 나의 몫이다. 그때가 객체로서의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메시지야말로 쇠라가 <Les Poseuses>에서 두 갈래의 여성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 주제가 아니었을까.


주식시장에서 개미투자자 또한 곤충과 동물이 죽은 척하기를 하듯 세력에 대응할 수 있다. 투자자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 방법은 무수히 많다.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나만의 변장술을 찾는 것이 기술적 분석의 궁극적인 목적 아니겠나.


세력과 개인투자자 또한 서로가 보고 보이는 관계이기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다 말할 수는 없다. 물론 현실적으로 개인투자자가 세력을 무찌르거나 세력에게 손실을 입힐 수는 없다. 다만 세력을 활용할 수는 있다. 세력의 등에 업혀 세력처럼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역발상이 필요하다. 가위바위보에서 묵을 내겠다는 상대를 순순히 믿고 빠를 내기보다는, 한 번 더 꼬아 생각해서 묵을 낼 줄 알아야 한다. 상대가 나를 속이기 위해 가위를 낸다면 묵을 낸 내가 이길 것이고, 정말로 묵을 낸다면 적어도 비기기라도 할 테니 말이다.


페르세우스 혼자였다면 메두사를 무찌를 수 없었을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볼 수 없다. 메두사만 페르세우스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테네가 준 청동 방패 덕분에 페르세우스 또한 메두사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미술계에서는 19세기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화가들이 관람객들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관람객들 또한 화가의 눈빛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우리도 세력의 의도를 보고 읽을 차례다.


Q. 상대가 A라고 말한다면 그 뜻은 A일 것이다. 일단은 상대의 말을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먼저다. vs 상대가 A라고 말한다면 그건 상대가 나로 하여금 A라고 믿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한 상대의 의중을 헤아려 파악해야 한다.

keyword
이전 28화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뤄져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