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맣게 타버린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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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녹아




이전에 썼던 기억력에 관한 글이 무색하게도 저는 요즘 제 머릿속의 지우개와 싸우고 있습니다. 차라리 소각기가 돌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재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기계 말이죠.


그때의 저는 기억을 박물관의 유물처럼 소중하게 보관하고 정리하는 큐레이터였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방화범이 된 것 같습니다. 내 손으로 내 기억들을 하나씩 불에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끔 무서워지기도 합니다.


물건을 놓고 오는 건 부지기수고, 단순히 깜빡하는 수준이 아니라 약속을 달력에 적어놓고 기억해내지 못하며 심지어 달력을 보면서도 ‘이게 뭐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냥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직접 적어놓은 글씨인데도 낯설기만 합니다. 병원 예약을 해놓고는 집에 와서야 ‘아, 오늘 병원 가는 날이었구나’ 하며 깨닫습니다. 이미 진료시간은 한참 지난 후였죠.


일상에서의 이런 문제들은 그나마 문제도 아닙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은 일할 때죠. 중요한 일을 놓치고, 동료가 분명히 말해줬던 내용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메모를 해놓아도 그 메모를 어디에 적었는지 잊어버리거나 심지어 메모를 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저는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언어 공부도 하고, 영양제도 종류별로 챙겨 먹습니다. 그래서 도통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희미하기만 합니다. 분명히 내가 살아낸 하루인데 실체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젯밤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고요.


이렇게 계속 잊어버리다 보면 나라는 사람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기억이 없는 사람은 과연 사람일까?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경험들이 새카맣게 타버린다면,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기억한다는 것도, 잊는다는 것도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일까? 그러기엔 그 균형이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구나.


내일 아침에도 저는 또 무언가를 잊어버리겠죠. 그리고 그것을 잊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것입니다. 새카맣게 타버린 기억들 사이에서 저는 또 하루를 살아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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