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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것은 의미를 갖게 되죠. 이름이 불리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방에 창문이 열리듯, 이름은 존재에게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에서 말했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이 시는 이름이 가진 가장 본질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이름은 단순히 구분을 위한 기호가 아닌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주술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 이름을 붙여요. 반려동물에게, 아이에게, 소중한 물건에게조차.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는 그것을 세상에서 특별하게 분리해 내는 의식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더 이상 '그것'이 아니야. 너는 '이것'이야"라고 선언하는 것. 그 순간 무수한 존재들 사이에서 하나의 고유한 울림이 생겨나죠.
반대로,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면 돌아갈 길을 잃는 것처럼, 이름은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닻입니다. 이름이 불리지 않는 존재는 서서히 투명해지고, 아무도 부르지 않는 이름은 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됩니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정말로 무언가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이름은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존재에게 말을 걸고, 응답을 기다리고, 그 응답 속에서 관계가 생겨나죠. 나와 너, 우리가 만나는 최초의 지점. 이름은 그렇게 단순한 음절들의 조합을 넘어서, 한 존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두 번째 탄생이 됩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나는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안다"는 확인이자, "너는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고백입니다. 한 사람의, 소중한 것에 대한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려 애쓰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다정하게 부르는 것. 이 모든 것이 그것의 존재를 긍정하는 방식이에요.
이름을 부른 다는 것은 누군가의 존재를 흔드는 일입니다. 동시에 누군가를 살아있게 하는 일이에요. 너는 여기 있고, 나는 너를 본다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불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담겨 의미가 되기를.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