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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노랗게 물들지도 않은 은행나무에서 폭탄들이 떨어져 은행 지뢰밭을 걷는 요즘입니다.
가을이 제대로 오지도 않았는데 은행나무는 이미 항복 선언을 했습니다. 노란 깃발 대신 노란 열매를 먼저 내놓으며, 계절의 순서를 무시한 채 바닥을 점령해 버렸죠. 아직 초록빛이 남아 있는 잎사귀들 사이로 은행알들만 먼저 떨어져, 보도블록 위에 지도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출근길 골목을 걸을 때면 저는 지뢰탐지병이 됩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땅을 주시하며, 저 노란 알갱이들을 피해 지그재그로 걷죠. 밟으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독특한 냄새가 신발 밑창에 각인됩니다. 아무리 문질러도 며칠은 가는 그 냄새.
동네 어르신들은 비닐봉지를 들고 나와 은행을 줍습니다. 장갑을 낀 손으로 능숙하게 은행을 골라 담으시는 모습을 보면, 이분들에게 은행 지뢰밭은 보물창고인 셈입니다. 같은 공간, 같은 은행알인데 누구에게는 지뢰고 누구에게는 선물이라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게 공평합니다.
요즘 날씨는 묘합니다. 아침에는 반팔을 입을까 긴팔을 입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둘 다 어정쩡하게 입고 나섭니다. 여름과 가을 사이 어딘가에 계절이 미끄러져 있는 것 같아요. 은행나무도 아마 그래서 헷갈렸을 겁니다. 언제 단풍을 들여야 할지, 언제 열매를 떨어뜨려야 할지. 그래서 그냥 둘 다 동시에 진행하기로 한 거죠. 나뭇잎은 아직 초록인데 열매만 뚝뚝 떨어지는, 이 이상한 풍경.
웃긴 건, 이게 매년 오는 일인데도 저는 매년 당황한다는 겁니다. 작년에도 은행을 밟았고, 재작년에도 밟았어요. 매년 10월이면 이 골목이 은행 지뢰밭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첫 은행을 밟으면 마치 처음 겪는 일처럼 적응이 되질 않습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이렇게 이중적입니다. 아름다움 뒤에는 항상 불편함이 있고, 감성 뒤에는 현실이 있습니다. 낙엽은 예쁘지만 누군가는 쓸어야 하고, 은행나무는 황금빛이지만 그 아래는 지뢰밭이고, 선선한 바람은 상쾌하지만 환절기 감기에 걸리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하지만 조만간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활짝 웃고 있을 제 모습이 그려집니다. 노랗게 빛나는 은행나무들을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에 담고 있겠죠. 지금 이 은행알들을 저주하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서 가을은 자꾸 돌아오나 봅니다. 우리의 기억이 너그럽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불편했던 것들은 다 잊히고, 아름다웠던 순간들만 남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을은 그렇게 매년 용서받고, 매년 환대받습니다.
내일도 저는 이 골목을 걸을 겁니다. 또 은행을 밟을지도 모르고, 또 신발을 문지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고개를 들면 눈부시게 노란 은행나무가 서 있겠죠. 그리고 저는 또 한 번 기꺼이 속아줄 겁니다. 가을의 거짓말에, 아름다움의 속임수에, 계절의 이중성에. 그게 바로 가을을 사는 방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