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 7.
번아웃 극복 작전의 최후의 수단이라 여겼던 그곳. 오늘은 몇 회에 걸친 정신과 상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실 정신과에 간다고 하면 사람이 왠지 비장해지고 심각해지고 어딘가 많이 문제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래서 많이 고민했다.
아직 상담을 받으러 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더라. 9월쯤이었나. 몇 개월 간 내 나름의 작전을 펼쳐 번아웃에서 벗어나려 노력해보고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또다시 급격히 찾아오는 우울감과 널뛰는 감정 기복, 그 소용돌이에 갇혀 스스로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무렵. 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당시 진료 전 적어낸 내 상태는 ‘2. 셀프 진단서’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크게는 무기력, 불안감, 충동성, 부주의, 건망증 등을 들었고 상담을 들어가기 전에 ADHD와 우울증 척도를 알아볼 수 있는 검사를 시행했다.
내가 불안감을 증상으로 말한 이유는 가끔씩 호흡이 가빠질 때의 느낌 때문이었는데 예상한 것보다 불안감 수치는 높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공황의 증상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ADHD 지수도 마지노선이긴 하지만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라고 했다. 대신 충동성과 우울감이 월등히 높단다. 생각했던 것보다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이었다. 폭식을 하거나 의미 없는 쇼핑으로 무리한 지출을 하거나 스스로 머리를 자르거나 한 번에 인간관계를 다 끊어내는 등의 충동적인 행동들도 올바른 방법으로 우울이 해소되지 못하니 자꾸 여기저기 삐져 나가는 거라고 하셨다.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는 내가 생각하는 원인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으셨고 불규칙적인 생활과 직장 상사, 고된 업무 때문인 것 같다고 하며 이직을 생각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부주의할 때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져서 자학도 많이 하고 그대로 스스로를 못질하듯 땅에 처박혀 벗어나지 못하던 나, 불행 중 다행히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대신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여기저기 몸에 구멍을 뚫어가며 피어싱을 해대고 타투를 새기는 등 내가 좋아서 했던 행동들이 정신적 고통을 잊으려 순간적인 육체적 고통을 즐기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자해에 해당될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래도 자기애가 강한 편인 것 같고 원인이 일과 회사에 관련된 게 맞다면 이직이라는 해결방안이 준비되어 있으니 긍정적인 면이 보인다고 하시고는 이직 전까지 함께 잘 버텨보자며 날 다독이는데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물 치료를 원하세요?”
“뭐...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고요.”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부분들이 많아서 일단 약을 받아왔고 경과를 보기로 했다. 선생님은 그래도 어떻게 병원에 올 생각을 다 했냐고 칭찬을 하시며 약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오랜만에 누군가 나를 돌봐주는 기분이 들어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약을 먹고 나서는 감정적인 효과는 둘째치고 무척 잠이 오고 머리가 무거웠다. 졸리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눈만 감으면 잠에 빠져들었다. 혹시 이렇게 잠을 재워서 우울을 느낄 새도 없게 만들려는 의도인가 의심했다. 다음 진료 때 말씀드리니 부작용 중 하나인데 내 몸이 약에 반응하는 민감도가 높은 편인 것 같다며 조금 더 부드러운 약으로 바꿔주셨다. 그렇게 괜찮아지는 줄 알았지만 한동안 잠잠하던 녀석이 불시에 찾아왔다. 과호흡.
어느 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호흡이 가빠졌고 병원에서 이럴 때 먹으라고 비상약을 줬다. 여기서 나 같은 초보 상담자가 흔히 하는 실수는 이렇게 내가 약에 의지해도 될까? 하는 마음에 약을 먹지 않고 참는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이왕 심장 박동이 가라앉지 않는 거 나가서 뛰어버리자.'라고 생각해 당장 한강으로 냅다 달려 나가면서 이게 건강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선생님께서는 그 이후로 괜찮아졌다면 다행이지만 오히려 트라우마가 발생될 수 있으니 그런 방법은 쓰지 말고 약을 아끼지 말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리고는 마구 웃으셨다.
"평소에 인기 많으시죠? 이렇게 유쾌하고 엉뚱한데 어떤 사람이 싫어하겠어요?"
기력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할 말은 다 하는 내가 재미있으시다며 눈물 나게 웃었다고 하신다. 정신과 의사란 자존감 지킴이의 역할을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약 때문인지, 상담 때문인지, 정말로 괜찮아지고 있는 건지. 괜찮아졌다고 믿는 내가 뇌를 조종하는 건지. 그렇지만 널뛰던 감정이 잠잠해지고 앞으로의 날들에 아무런 기대도 없던 내가 긍정적인 미래를 떠올리는 걸 보면 점차 호전되고 있는 것 같다. 혹시나 두려움에 정신과 가기를 망설이는 분이 있다면 지체 없이 병원을 방문하라고 말하고 싶다.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 건지 예약을 잡기도 쉽지 않았는데 그 말인 즉 정신과가 많이 보편화되었다는 뜻 아닐까.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지만 이젠 정신과에 다닌다고 누구도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시선보다 내 생각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한 일 같다. 감기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는 것처럼 마음에 감기가 왔다고 생각해보자. 스스로 감당하기 어렵다면 이런 선택지도 있다는 것을,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비로소 일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힘을 기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