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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즈 Oct 31. 2019

십일월, 리스본

삽 십여 년 탑재한 눈치가 무색하게도

꽤 오래 해외여행을 다녔는데, 나의 첫 경유였다. 나는 태어나기를 무조건 '효율'을 일 번으로 추구하는 사람이라 경유의 매력을 전혀 모른 탓이다. 경유지는 독일 어딘가였는데, 공항 깨끗하고 오랜만에 마시는 진한 커피 한잔이 좋아서 경유도 괜찮군 했다. 


첫 경유니 다음 비행기를 혹시나 못 타면 어쩌나 잔뜩 긴장을 하고, 무려 30분 전에 카운터에 앉아 오매불망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데.. 30분은 진작 지났고, 40분, 50분이 되는데도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다. 신기한 건 이런 상황에도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는 것. 삼십여 년간 탑재해 온 내 눈치가 말했다. 


- 그냥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무려 출발 시각보다 40분이 지나서야 탑승을 시작했다. 승무원들은 딜레이 시간을 죄송해하지 않았고, 딜레이에 많은 사람들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세상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2017년 십일월, 리스본 by 리코 GR


이상한 세상은 다음 날에도 계속됐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카페를 갔다. 생전 아메리카노도 안 먹는 사람들이 에스프레소를 마신단다. 그래서 그렇다면 나도. 에스프레소 4잔을 주문했다. 바에 직원이 두 명. 그런데 이 사람들 이상하게 일을 한다. 한 명이 주문받고, 다른 한 명이 만들고 전달하면(테이크아웃이니까) 될 것 같은데 둘 다 뭔가 같은 일을 하며 수다를 떤다. 줄은 줄지 않고, 우리는 기다린다. 그때 내 눈치는 그냥 기다리라고 말했다. 


2017년 십일월, 리스본 by 리코 GR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상한 이 세상이 불편하고 낯설었으며 심지어는 '틀렸다'라고 생각했다. 포르투갈에서 약 한 달을 살면서 모태 탑재된 눈치가 기다리라 말했기에 별 군소리 없이 이 모든 상황들을 마주했지만 사실 나는 그들이 성실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후 내 의지와는 다르게 유럽에서 작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3달을 체류할 일들이 생겼다. 물론 이 이상한 일들은 반복됐다. 



어느 날 마트에 선 내가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져온 물건에 바코드가 없었던 것. 계산을 할 수 없으니 캐셔분이 다른 캐셔를 부른다. 벨도 누른다. 그러나 결국 아무도 오지 않으니 캐셔가 직접 간다. 뒤에 늘어선 십여 명의 사람들이 계산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나라면 뒷사람들 눈치를 봤을 것이다.(물론 그전에 다른 담당 직원이 나를 빼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더 빠르게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나는 자연스럽게도 뒷사람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짓고, 그 사람도 나를 보며 웃었으며, 뒤에 기다리고 있던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2017년 십일월, 리스본 by 리코 GR


그날이 되어서야 내가 이상한 세상에 도착한 그 날. 연착은 승무원의 잘못이 아니므로 사과할 필요가 없고, 연착은 어떤 이유로든 발생 가능한 일(저가항공에서는 종종 일어나므로)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서비스'로 인해 불쾌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나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결정적으로 삼십여 년 탑재한 내 눈치가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당연했던 내 배려라든지, 발 빠른 게 행동한 것들이 강요될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겠다. 물론 습관처럼 되어버린 '누군가를 의식하는 일'은 단숨이 벗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나를 가볍게 만들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몹시도 빠르게 변하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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