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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May 03. 2018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
지켜주지 못한 자존감

내 안의 삶을 산다는 건 세상의 기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나는 솔직한 사람이라 말하지만 단 한 번도 솔직한 적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진실한 나를 보이기보다 상처받을 걸 미리 계산해서 행동하는 사람이다. 숱하게 고백했던 사랑의 말들, 모두 거짓이었다.


“헤어지자 우리”

예상했던 그의 이별. 불안에 떠는 마음을 들킬 세라 빠르게 거짓을 말한다. 담담하다는 듯, 씩씩하다는 듯 혹은 애초부터 당신 따윈 의미 없었다는 듯. 혹시나 그를 마주할 때면 차가운 얼굴로 스쳐 지나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상처를 한가득 받아 아팠고 마음으로 울었다. 하루 종일 그 사람이 한 말을 곱씹고 해석하려 애썼다. 가장 슬펐던 것은 이 와중에도 거짓된 행동들로 일관하는 내 모습이다. 단 한 번도, 누구 앞에서고 초라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강한 사람이고 싶었으니까. 또 진짜 그런 사람인 줄 알고 있기도 했고…


“친구로 지내요”

그에게 친구로 지내자 말했다. 거짓말이다. 나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라고 말했다. 이 또한 거짓말이다.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괜찮을 거라며 되지도 않는 설득을 했다. 그 사람은 내게 솔직해지라고 다그쳤고 난 솔직하다 큰소리쳤다. 정말이지 나란 사람은 멋이 없다. 대체 그 순간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세상을 논했던 지난날의 나는 그곳에서 모두를 비웃었다. 옹졸하기 짝이 없었다. 삶에, 마음에 여유가 없었고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은 당연히 나를 피해 갔다. 그럼 또다시 나는 그들을 나무랐다.


‘뭘 모르는 것들’


살면서 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늘 웃고 있는 삐에로도 실은 자기가 슬프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눈은 그리도 날카로우면서 내 안을 들여다보는 눈은 동태 같았다. (사실 동태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가면을 쓰고 살았던 그 오랜 세월이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가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 못하는 머저리 상태. 그러다 그날이 찾아왔다. 처음으로 거울을 마주하던 날. 예쁜 옷과 화장으로 잘 포장된 모습들 속에는 주근깨와 기미로 득실대던 시시한 얼굴이 있었다. 나약한 속내를 감추기 위한 과장된 자신감들까지. 별 볼 일 없는 알량한 자존심들…


사람이 변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은 역시 ‘자기 자신’뿐이다. 책도, 심리치료도, 연인도 그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다. 옆에서 백날 좋은 말 해줘 봤자 다 헛짓이란 뜻이다. 물론 그것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수단, 계기, 또는 발단, 더 어렵게는 촉매제가 될 수는 있으나 발걸음을 떼는 주체는 결국, 나란 사실.


난 솔직한 사람이에요.

아뇨당신은 전혀 솔직하지 않아요.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기에 연애가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갈등을 마주할 때도 이별을 할 때도 죄인은 언제나 상대방이었다. 비난의 화살을 바깥쪽으로 돌리고 나를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나는 항상 올바랐고, 착했으며 배려했다. 반면 상대는 매번 생각이 없었고 내게 상처를 줬고 이상했다. 그렇게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고 뿌듯해했다. 


ⓒRyan McGinley Photo


나는 어떤 사람인가.     

혹자는 말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끝내 답을 말하지 못하는, 인생 최대의 난제라고. 그러기에 우리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 매분 매초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란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돌아봐야 한다. 뼈아픈 고통을 감내하며 나를 질책했다. ‘나’란 존재는 ‘그렇게 되기를 혹은 그리되었으면’ 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를 돌아보면서 모든 것들이 헛됨을 깨달았다. 나의 실체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은 참으로 끔찍하다. 그럼에도, 인정해야 한다.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할 때다. 있는 그대로.


내려놓자, 버리자, 부질없다.


그때 알았다. 

나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내 안의 삶을 산다는 것. 진정한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다. 세상의 기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나란 사람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고, 어떤 능력이 있고 없으며,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떤 행동을 보이는 사람인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냉정하고도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나란 사람을 사랑하고자 애쓰는 마음들…

 

이 기간에 접어든 지 꼬박 2년이 지나고 있다. 마음의 시선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돌리는 일. 분명 이 과정에서 거추장스러운 불쾌감과 회피하고픈 욕구가 들 것이다. 어렵고 복잡하고 불명확한 건 늘 피하고 싶으니까. 또 민낯의 나는 생각만큼 멋지지 않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찌질한 줄 꿈에도 몰랐지

게다가 자기모순덩어리라니!’


그런데 자존심이 세다는 건 나쁘기만 한 것일까. 아니다. 다만 순서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자존감을 먼저 높이고 나면 저절로 자존심을 올바르게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분명 자존심이 멋지게 센 사람은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에만 날카로운 날을 겨눌 것이다. 시시껄렁한 것들에까지 모두 결투 신청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제 내게 또 다른 숙제가 주어졌다. 나에게 소중한 무언가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일. 내가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나의 인생, 나만의 여행을 떠나려면 내 안의 것을 살아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마치, 누군가 써놓은 여행 가이드북에 맞춰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그건 나의 여행이 아니다. 그 가이드북을 쓴 작가의 여행일 뿐이다. - 어느 작가의 그 어떤 화려한 여행기를 쫓아 여행을 떠나보아도, 길 잃은 골목, 이름 모를 식당에서 먹고 즐겼던 그때 그 시간과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 


고로 내 안의 것을 살아야 한다.

지켜주지 못한 자존감을 지켜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선 내 안의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솔직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나는 오늘도,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



@Yogurt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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