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나무의 꿈 04화

행운이 그대에게, 은행처럼

- Serendipity세렌디피티에 대하여

by 진주

시간은 언제나 균질하게 흐르지만 한 해가 저무는 즈음에는 유독 뭉텅 잘려 나가는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을 치기 때문일까요. 섣달 그믐날 밤과 새해 아침은 인생이란 긴 책 속의 한 페이지처럼 맞붙어 있다는 사실도 곧잘 잊게 됩니다.

시간은, 우리와 상관없이, 스스로 제 길을 가는데 말이지요.


한겨울임을 잊지 말라는 듯 온세상이 얼어붙은 날 아침 산책길에 뜻하지 않은 수확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은 그런대로 말랑말랑한 과육을 벗기니 딱딱한 알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은행나무 열매였어요.


영어 단어 하나가 머리를 스칩니다.

‘serendipity세렌디피티.'


이 ‘세렌디피티’가 여느 행운이나 요행과 구별되는 지점은 정보를 가진 자 혹은 준비된 자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행운이라는 것이지요. 고대 페르시아 동화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호레이스 월폴이란 작가가 1754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말입니다.


은행의 수확기는 우리 모두 알다시피 가을입니다. 그런데 영하의 삭풍 속에 내 발 앞에 툭 떨어진 것은 분명 은행알이었어요.

도시에서 은행나무 혹은 은행 열매는 기피와 혐오의 대상입니다. '은행나무 낙과로 인한 악취와 및 미관 저해 대책을 마련'하느라 약제를 살포하고, 수나무를 아예 암나무로 대체하겠다는 지자체도 나오고 있을 정도입니다. 볕 좋은 가을날 가로수 아래, 발에 밟히는 은행알을 피해 이리저리 발걸음을 떼어놓는 사람들... 아주 흔한 도시의 늦가을 풍경입니다.

이것뿐일까요.

한겨울 어느 한적한 산책길 의젓한 나무 아래 잔설과 썩은 나뭇잎 갈피 갈피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은행이 남아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잘 여문 은행알은 가을철 나무 밑동에 자연스럽게 떨어져 낙엽더미에 묻힙니다. 겨울이 깊어질 때까지 비바람과 인간의 탐욕을 이기고 곱게 알을 지켜낸 나뭇가지도 있어,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툭 하고 내 앞길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도 나는 압니다. 말하자면 내게는 정보가 있었던 것이지요. 은행의 딱딱한 껍질을 깨고 프라이팬에 올리브오일을 뿌린 후 살짝 볶으면 탱글탱글한 초록빛 알이 얼마나 쫄깃하고 맛이 있는지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벌써 입에 군침이 돕니다.


추운 겨울 내가 은행을 만나고 줍게 된 그 우연은 힘들어 하지 말라는 무언의 응원 같습니다.

모두가 가는 길이 아니라 외롭고,

힘들더라도 묵묵히 가야 한다는,

그리고 열정과 끈기로 간다면 우연처럼 행운도 찾아올 것이라는 메시지도 함께요.


혹시 꿈을 가졌다면 그대, 쉽사리 놓아버릴 수 없는 꿈이라면 부디 꽉 쥐기를요.

손바닥을 폈을 때 거기 비록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바로 그 쥔 힘으로 가기를요.

숨을 쉬고 있으니까요. 세월은 가고 시간은 흐르고 있으니까요.

행운이 그대에게 은행, 아니 은총처럼 다가올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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