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주 Jun 06. 2019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다

 

 어머니로부터의 대물림인지 40대 초반부터 염색을 해야 했습니다. 염색약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단백질인 케라틴에 인위적으로 색을 입히는 일이니 부작용이 없을 수가 없지요. 다들 부러워하던 풍성한 머리숱도 옛날 얘기가 되는 듯했고, 시력도 많이 나빠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귀찮았습니다. 그 번거로움과 성가심이야 염색을 하고 있는 누구라도 공감할 테죠. 어느 날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정수리부터 머리가 세기 시작했는데 두 달 정도 지나자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염색으로 감추어 온 흰머리가 드러나자 약사님이 스트레스가 심하신 모양이라느니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느냐는 등의 동정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근무약사의 젊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작은아들보다 어린 그가 인터넷으로 구매해준 금빛 컬러린스를 사용해서 또 한 달을 버텼습니다. 그 한 달 동안 내 정수리는 황금빛으로 물들었는데, "약사님이 특이한 브릿지를 하셨네요"라는 덕담이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    

 

먼저 세기 시작한 정수리쪽이 금색으로 변했을 때

 최종 결정의 순간이 왔음을 말해주듯 컬러린스의 효용도 어느덧 끝이 났습니다. 

 그러자 나는 내 머리색이 실제로 어떤 색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대체 내 머리칼은 무슨 색이었던 거야! 하긴. 나도 모르는 내 머리색이라니. 흰머리는 몇 퍼센트고 검은머리는 또 몇 퍼센트일까요. 우리가 막연히 '검은'머리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는 흑갈색이거나 자연갈색이거나 자연 진갈색 가운데 하나일 것이고 이 또한 여러 색이 섞여있을 테지요.    


 그래서 우선 탈색을 선택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색 빼기 작업이었는데 이 정도면 다 녹아버린다는 표현을 쓸 정도로 머리칼이 깊은 손상을 입는다고 합니다. (그날 내 눈빛이 너무 단호해서, 그 엄청난 작업을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고 후일 디자이너가 고백했습니다.)  

 20년 가까이 어마어마한 세월 동안 염색약을 먹어온 내 모발은 표피(큐티클)를 넘어 멜라닌색소를 함유한 피질에까지 여러 색소가 덕지덕지 침착되었을 터였습니다. 이를 벗겨내는 작업이니 오죽 하겠습니까. 세월만큼 누적된 색소를 지우는 엄청난 일이었지요.    


 여기까지가  다소 파격적인 머리색(의 프로필 사진)이 나온 경위입니다.

 멋있으라고 한 게 결코 아니었습니다.^^ 

 



 흰머리가 일찍 나기 시작했지만 세상은 퍽 공평한 것이어서, 내 모발이 꽤 건강했었던 모양입니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손상이 덜하고, 탄력과 윤기도 남아 있어서 제 머리를 손봐준 헤어디자이너가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컬러도 나쁘지 않아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대로 지냈습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거부감이 그다지 크지 않았고 아이돌 같다는 아부(?)는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말로는 괜찮다고들 하니 그럭저럭 지낼 만했습니다.      

 아닙니다. 지낼 만한 정도가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약국에 오는 환자들은 정말로 내 머리색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환자들이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이 잦아졌어요.  

  "스타일이 확 바뀌셨네요."    

 이 말 한마디에는 사실 많은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안다는 뜻이고, 약국에 종종 왔다는 뜻이며, 또한 그러한 사실을 내게 드러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지요. 우려와 달리 '확 바뀐' 머리에 나름의 호감을 내비치며 다양하게 응원하고 한껏 격려해주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여느 약국과 달리 굿모닝약국은 문도 없고 간판도 없습니다. 마트 본사에서 정한 대로 옆 안경점과 나란히 색과 글자체를 맞춘 <약국 PHARMACY> 뿐입니다. 돌출 간판도 없고 트레이드마크인 적색 십자가도 굿모닝약국에는 없습니다. 그런 조건에서, 내 머리색을 멀리서 보고 다가와 말을 건네는 일이 일어나는 건, 결과적으로 대단한 이벤트였다고나 할까요. 의도하지 못했던 홍보 효과를?     

 계산대 쪽에서 보면 나는 아마도 약국 안에 서 있는 그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평균 하루에 백 명 넘는 사람들이 약국에 오는데 내가 얼마나 기억할 수 있겠는지요. 이렇게 드러내어 나를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오늘 굿모닝약국에 처음 온 것인지, 언제부터 오기 시작한 분인지를 물리적으로는 기억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일하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혼자 읽고, 사색하고, 글 쓰던 시간은 진작 다 흘러갔습니다. 이제 나는 사람들 속에서 일합니다. 


 내 업이라 여깁니다.

 직업이며, 복과 덕을 가져다주는 업이고, 또 카르마 karma이기도 한. 그러니 나는 이제 겨우 시작한 셈입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아프지 마오 약국에 있습니다.    

이전 10화 한쪽 문은 이렇게 열리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