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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Jun 13. 2019

글 짓는 약사, 약 쓰는 작가

                        

  “뭐하던 분이세요?”

 뜬금없는 이런 질문을, 약국에서 가끔 받습니다.

 

 여러 직업을 거쳐 지금은 약국을 하고 있는 나를 누구는 카멜레온 같다고도 하고, 자리의 스위치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칭찬(이겠죠?)도 합니다. 스위치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소리는 “왕년에 나 이래 뵈도” 운운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텐데,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과 나란히 앉아 박사과정 수업을 듣는 것을 본 교수가 해준 말이니 뭐 욕은 아니겠지요.


  “아니 교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교수(정확히는 교수였던 사람)가 뭐요. 나는 환자가 먹다 흘린 쌍화탕 국물이 묻은 진열대도 닦고, 포장박스를 까고 약을 꺼내 진열도 하고 (이런 걸 마트에서는 '까대기'라고 하더군요), 폐의약품이라고 가져온 봉지에서 쓰레기와 약을 분리하기도 하고, 진짜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높은 진열장 속 약을 꺼내기도 하고, 모두 해서 사천 구백 원입니다 소리도 하고, 동전을 거슬러 주기도 합니다. 경찰서에 가서 진술도 해보았고, 협박을 받기도 했으며, 내 앞으로 집어던지는 지폐를 줍기도 합니다. 어떤 일도 나는 다 할 수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파는 건 내겐 너무 지루한 일입니다. 나는 나이고 싶을 뿐 어머니이거나 작가이거나 약사라는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고 싶지 않아요. 내 삶은 현재 진행 중이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내 면허증으로 먹고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원고청탁이나 강의 얘기가 나올 때 실은 지금 약국을 하고 있어요 라고 고백(?)할 때에는 마치 커밍아웃이라도 하듯 용기가 좀 필요하긴 했습니다. 그런 고백도,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가능했어요. 자리의 스위치가 가능한 사람이면서 말이지요.

 약국을 하고 있노라고 자연스럽게 나를 소개하고,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도 마음껏 사줄 수 있고 고용 창출에도 이바지할 뿐 아니라 인근은 물론 수원에서 시흥에서 또 안산에서 “예쁘장하고 약 주시는 약사님”을 찾아오는 환자들도 꽤 많다는 낯 간지러운 소리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합니다.  


 아주 오래 전 한 약계 전문지에서 실시한 '객원기자와 함께하는 기자 워크숍'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약방에 감초처럼,  돌아가면서 한마디 하기를 꼭 하지요. <수필쓰기 교실>을 연재하기로 예정되어 있긴 했지만 객원기자로까지 위촉된 사실도 몰랐고, 그랬으니 당연히 별로 활동한 것도 없고, 그 신문사에 대해 아는 바도 없는 처지인지라 편집국장에게 손으로 X표를 치는 시늉까지 해가며 사인을 보냈지만 마지막 순서로 턱 하니 소개까지 받았으니 그 ‘한마디’를 결국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로 약사들이 보는 신문이라고 해서 왜 약 얘기만 싣는지 의문을 가졌습니다. 약사의 다양한 영역만큼이나 다양한 관심사가 존재할 터이니 시야를 좀 넓히는 것도 좋겠고 그래서 내 역할은 그 가운데 하나를 충족시켜주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의 <수필교실> 연재가, 1차적으로는 당장 글을 좀 써보고 싶었던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글쓰기가 주는 미덕의 하나인 내재된 창의력을 끄집어내는 힘은 약국 경영에도 필요하다고 여겨지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거름도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내가 한 '한마디'는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개발한 좋은 원천기술을 가지고 창업한 사람들도 사업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가장 갈증을 느끼는 부분이 인문학적 상상력, 창의력이라고 하더군요. 약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여겨졌습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니 어떤 분이 대뜸 내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약사 맞아요?”


 자기소개 때 과거 무슨 수사대에도 있었고 검찰에도 있었으며 지역 자문위원이기도 하다고 했던 그분은 당시 약국가의 위기의식과 관련하여 언성을 높인 자신과 '한가한' 내가 비교되어 그랬던 것인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어요. 하지만 나는 무례한 태도 말고는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우습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죠. 그에게는 그때 내가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고 있나 싶었을 수 있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겠지요. 문학은 혹은 예술은, 먹고사는 데 도움이 별로 안 된다는 생각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실제로도 도움이 안 됩니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바로 문학과 예술의 존재이유입니다.)

 경제가 어려운데 왜 문사철(인문학!)에 뜨겁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쩌면 일부러 눈과 귀를 막는 사람들에게는 인문학적 접근이란 허황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어요. 모두가 똑같은 길을 함께 걸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탓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의 내 생각이 틀렸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질문은 사람을 고양시킵니다. 그날의 해프닝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나는 작가지만 싫든 좋든 약사임도 분명했습니다. 대학 때부터 약을 멀리하려고 그토록 애썼지만 그 둘은 언젠가 연리지처럼 하나의 나무로 자라야 할 것임을 그때 처음 운명처럼 느꼈습니다. 다른 가지를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뿌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았지요.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지금 나는 약국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연리지처럼 하나의 나무로 자라야 할 것”이라 예감했던 대로.

두 나무가 하나 된 연리지

 약사로서의 시간을 더 많이 (아니 거의 다)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작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선생질하느라 작가 아닌 前작가가 되었다고 시니컬하게 말하던 어떤 교수님이 생각납니다. 나도 前작가라 불리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문학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지금, 이전과는 내가 상당히 변했음을 느낍니다. 삶을 대하는 궁극적 태도랄까 관념적 자유를 만끽하고 관념적 행복에만 자부심을 갖던 시절의 나로부터 무척 멀리 온 느낌입니다.


 흔히 형이상학적이라고 하는 고민들은 때로 사치처럼 여겨집니다. 약국에 위기가 닥치면 그런 한가한 고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지요. 맞아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알렉산더도 디오게네스도 다 우리 삶의 모습인데요. (알렉산더와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너무나 유명해서 검색하면 바로 나옵니다.^^)

 알렉산더의 삶도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그것이 권력이고 힘이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디오게네스처럼 살 필요는 없으니까요. 힘(또는 돈)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을 경멸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반대로 알렉산더의 삶을 굳이 연민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삶에 대한 궁극적 태도를 찾고 실천하는 걸음이 다 의미 있는 것이지요. 인생이란 게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인생이란 없는 의미를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일지 몰라요.


 수많은 직업 가운데 약사라는 ‘건강 관련 서비스’ 직의 길을 선택했다면 그리고 이 길에서 성공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나의 서비스는 무료가 아니라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금전적 가치를 지녔다는 인식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입니다. 제공할 서비스를 위해 내 능력을 증진시킬 책임이 있다는 것도요.

 글 쓰는 일이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하듯 약사인 내게 사람은 가장 귀한 덕목이고 그래서 나의 약국 경영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느냐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고 이루어집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 없이는 결코 잘 해낼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운명은 때로 사람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갑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 날, 내가 또 다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약사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나이 마흔에 문학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었던 지난 내 행로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어디서 무얼 하든, 사람을 생각하고 그 마음을 보려 하던 ‘나’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다고, 늦은 밤 부끄러워하며 따뜻한 김밥이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내민 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 날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런 날을, 그런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려 합니다. 약을 많이 팔아서,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그런 소소한 행복이 나를 고양시켰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아프지 마오’ 약국에는 어떤 날 행복했었는지를 기억하는 한 약사가 있습니다.

 그대 부디 아프지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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