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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May 30. 2019

한쪽 문은 이렇게 열리고

 사람을 대할 때를 빼고는 나는 매사 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편입니다. 아마도 무의식적인 자기방어 기전이 아닌가 싶어요. 항상 가장 나쁜 일을 상정하고, 그리고 대응책을 미리 마련해 놓지 않으면 불안한, 말하자면 전형적인 약자의 심리죠.   

      ‘이보다 더 나빠지는 일은 없을 거야.’

 

 이처럼 소위 '바닥을 치는' 생각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면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일상에, 삶에, 또 신께 더 많이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거지요. 반복되는 일상이란 자칫 지루하고 고인 물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지극히 평온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되니까요. (이렇게 일상을 감사하게 느끼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건 심리적 결핍감을 해독하는 약이라고, 혜민이란 스님도 말한 바 있군요.)


 물론 이런 사고방식이 꼭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도 이런 내가 맘에 들지 않아요. 

 왜 항상 극적이어야 하지... 왜 꼭 비관적인 방식으로 삶의 기쁨을 누리려 하는 거야...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라는 거잖아...

 ...........


 돌이켜보니 떼를 써본 기억이 없네요. 처지를 모른 체하며 억지 부리고, 그렇게 해서 뭔가를 얻은 무애의 행복한 기억이 내겐 없습니다. 알아서 참고 누르고 스스로를 달래야 했지요. 가질 수 없는 것, 싫어도 꼭 해야 하는 것, 짐 지고 가야 하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알았습니다. 스스로 분수를 알아채고 분수대로 행동하게끔 자신을 단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 어린아이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일찍 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긴 제대로 철이 들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계속 이렇게 살게 되겠지요.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는 정신’으로 말이지요.^^  

 

 신은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한쪽은 열어 놓는다고 합니다. 과연, 모든 문이 꽉꽉 닫혀도 작디작은 창문 하나가 열리기도 하더군요.

 유독 힘든 일이 많은 날이어서 그랬을까요. 서두가 장황해졌습니다. 



 

 약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옵니다. 아프지 않는 사람도 오고 아픈 사람도 오지요. 몸이 아픈 사람도 오고 마음이 아픈 사람도 옵니다. 그리고 사람 수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 맞아요. 요즘 약국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특히 많아진 것 같습니다. 약국에서는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껴요. 아마도 훈남 약사가 주인공인 TV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탤런트 정해인 못지않게 잘 생긴 후배 약사가 권하기에 못 이기는 척 천 오백 원을 결제하고 모바일로 1, 2회를 보았습니다.

 약사인 남주와, 여주의 첫 만남은 아주 강렬했습니다. 

   “술 깨는 약 좀 주세요.  쎈 걸로요.” 

 약국으로 들어서자마자 여주는 약사 얼굴도 안 쳐다보고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약사인 남주는 말없이 숙취음료를 따 주면서 (그랬다가 여주로부터, 저기요 뭐 내가 깠어요? 약사님이 뚜껑 깠잖아요, 라고 바로 공격당합니다만.) 섞어 드시면 좀 나을 거라며 앰풀을 타 줍니다. 알약도 친절하게 까서 건넸죠. (물론 머리를 묶을 고무줄도요.^^)

 실제였다면 혹시 구토가 있었느냐, 머리가 아프진 않으냐 등의 질문을 했을 거지만 비교적 실감나게 재미있게 그렸더군요. 지갑을 두고 와서 생긴 해프닝을 통해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 매우 중요한 씬을 이렇게 약국에서 찍었네요.    

 

 어제는 굿모닝약국에 특별히 좀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분기탱천하다 곧 쓸쓸해지고, 소름 돋게 뭉클하고 뿌듯하고, 어처구니가 (다 도망 가고) 없어서 그냥 헛웃음을 웃고 마는 일까지, 하루에 다.

 약국도 여느 일터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이 다 녹아있습니다.  이번에는 나도, 불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행복을 오롯이 느껴보려고, 분기탱천한 그림은 빼고 행복한 그림만 모아 봅니다. 한쪽 문은 이렇게 열리는 것 같습니다.


 #장면 하나.

  “여기 되게 친절하네?” 

  “응. 이 약국 원래 그래. 그래서 내가 꼭 이리 오잖아.”

 여자 하나에 남자가 두엇 섞인 무리가 약국을 떠나면서 서로 주고받는 말이, 내게도 들립니다. 

 

#장면 둘.

  전화로 항히스타민제에 대해 자세히 물어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로 어떤 증상에 복용하는 약인지 대표적인 부작용이 뭔지 대략 설명해 주었더니 감사를 표하며 “저 굿모닝약국 근처에 살아요.” 합니다. 발신자표시 서비스가 되는 터라 “에이, 서울 지역번호던데요?” 라며 웃었더니 근무지가 서울이라 그런 거라네요.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뭐래?) 굿모닝약국에는 '굿모닝약국'이 없습니다. 다들 그냥, ~마트 약국이라고 불러요. 규정된 레이아웃 말고는 따로 간판을 달 수 없거든요. 그런데도 약국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충성도 높은 환자가 과연 누굴까,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지요.     


#장면 셋.

  한 아가씨가 “약사님이 주로 계시는 시간이 언제인지"를 묻습니다. 심하게 체해서 왔었는데 금세 좋아졌고 지금은 일러준 대로 음식도 가려서 먹고 있다고, 칭찬을 바라는 아이처럼 얼굴이 발그레 졌습니다. 내가 “약국에 나와 있다는 사실을 적에게 알리면 아니 되”지만,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한쪽 문이 열립니다. 언제든 한쪽 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면서요.

 어제 저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약이 잘 들어도 그대 부디, 자주 오지는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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