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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명운 Aug 05. 2018

6. 혁이 이모

  은우는 나가 놀 마음에 대문부터 열었다가, 소변이 급해 마당에 있는 수챗구멍에 대고 오줌을 누었다. 볼일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웬 낯선 아줌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은우는 순간 아차 싶었다. 오줌만 누고 나갈 생각에 대문을 닫지 않았었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은우는 낯선 아줌마가 자신의 고추를 보지 못했길 바라며, 

  - 누구세요?

  - 이~ 여기 방 있다고 해서 보러 왔는데, 들어가도 되니?

  은우는 월세로 내놓은 아랫방을 보러 온 사람이려니 생각하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분명 표준어를 구사하긴 하는데 억양이 좀 특이하고 말이 느렸다. 아직 각 지방의 사투리를 명확하게 구분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분명 지금까지 들어 왔던 사투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은우는 대답을 하기 전에 대문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낯선 아줌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에서 악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은우는 순간 무장 해제되려는 자신을 다잡으며 뭔가 수상한 점을 발견하려 애썼지만, 오히려 눈에 띈 것은 포대기 속에 잠들어 있는 아기였다. 은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뒤로 물렀다. 

  - 어느 방이니?

  은우는 외딸린 부엌이 있는 아랫방을 가리키며

  - 여기요.

  - 이~

  아기를 업은 아줌마는 그리 길게 살필 것도 없는 방을 꽤 오랫동안 살펴보더니, 힘이 들었었는지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을 본 은우는 난감했다. 엄마가 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아줌마가 저렇게 자리를 잡고 앉으면 밖에 나가 놀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방 보러 온 손님을 나가 놀아야 한다는 이유로 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줌마는 그런 은우의 속마음도 모른 채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 너 몇 살이니?

  - 일곱 살이요.

  - 이~ 일곱 살~, 엄마는 늦게 오시니?

  은우는 옳다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 올려면 아직 한참 남았어요.

  - 으응 그래? 몇 시쯤에 오시는데?

  - 여섯 시 반이요.

  - 이~ 그럼 아줌마 여기서 엄마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되니?

  은우는 순간 좌절하며 절대로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럴 만한 구실을 찾을 수 없었다. 은우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줌마는 은우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 밖에 나가 놀려는 거 아니었니? 괜찮으니까 나가서 놀아도 돼. 

  은우는 속마음을 들킨 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황급히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아줌마는 그런 은우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엄마가 올 때까지 장장 세 시간 가량을 이 낯선 아줌마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가 노는 건 포기한다 하더라도 그 긴 시간 동안 낯선 어른을 감시하며 꼼짝 않고 있어야 할 걸 생각하니, 은우는 앞으로 견뎌야 할 세 시간의 지루함과 피곤함이 이미 온몸에 무겁게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은우는 감시자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아줌마와 정면으로 대치한 마루 위에 올라앉았고, 그 순간부터 마당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함과 긴장감이 섞인 미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그 어색한 긴장감을 풀기 위해 은우에게 간간이 질문을 던졌지만, 은우는 차라리 침묵의 시간이 더 편했다. 은우가 그렇게 지루한 경계 속에서 지쳐갈 즈음, 아줌마의 등에 업혀 있던 아기가 잠에서 깨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은우는 그 예기치 못했던 변화의 조짐이 너무 반가웠고, 아줌마는 그에 화답하듯 포대기를 풀어 아기를 앞으로 안고는 은우를 보며 물었다.

  - 애기 볼래?

  은우는 자연스레 마당을 가로질러 아기 앞에 섰다. 은우는 아직 어른들이 예뻐하는 것처럼 아기를 예뻐할 줄 몰랐다. 그저 앙증맞은 모습이 신기할 뿐이었다. 아직 채 펴지지 않은, 쭈글쭈글한 갓난쟁이들의 얼굴을 보고 예쁘다고 말하는 어른들에게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쁘건 못생겼건 아기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줌마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도 딱히 예쁘다고 느낄 만한 얼굴은 아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아기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작고 귀여운 손과 맑은 눈망울 그리고 금붕어처럼 빠끔거리는 조그만 입을 보고 있자니 쉽사리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 이름이 뭐예요?

  - 혁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조금 전의 어색한 긴장감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은우는 한결 마음이 편했다. 자연스레 아줌마에 대한 경계심 또한 친근감으로 기울 무렵, 품에 있던 아기를 어르던 아줌마는 아기의 칭얼거림이 심해지자 아무렇지도 않게 옷깃을 풀어 젖을 물렸다. 갑작스레 아줌마의 젖가슴을 가까이서 보게 된 은우는 흠칫 놀라며 황급히 시선을 아기의 얼굴로 돌렸지만, 아기가 엄마 젖을 빨고 있는지라 아줌마의 젖가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무안해진 은우는 아기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슬그머니 마루로 돌아와 앉았다. 불행히도 아기가 가져다 준 평온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젖을 먹던 아기는 금방 잠들어 버렸고 은우와 아줌마 사이엔 또 다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아기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생성됐던 약간의 친밀감도 은우로 하여금 낯선 방문객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게 할 수는 없었다. 은우는 잠시 풀렸던 긴장 뒤에 밀려오는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졸기 시작했고, 아줌마는 앉아서 졸고 있는 은우에게 편히 누워 잘 것을 권했지만 은우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고개를 떨구기를 반복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앉은 채로 졸다가 곤히 잠이 들었던 은우는 맞은편에 있어야 할 아줌마가 보이지 않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사방을 살핀 은우는 황급히 안방 문부터 열었지만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어 순미 누나의 방과 부엌도 들여다본 은우는 잠들기 전과는 달리 닫혀 있는 아랫방 문을 발견하고는 발뒤꿈치를 들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방문 앞에 선 은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키고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레 방문을 옆으로 밀었다. 조금씩 열리는 문틈으로 누군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가슴 졸였던 긴장감이 무색하게,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건 곤히 자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었다. 급작스런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다소 안정을 찾은 은우는 다시 한번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반쯤 열린 대문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 봤지만, 좌우 골목길 끝자락까지 이어진 길에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은우의 머릿속엔 또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아줌마의 묘연한 행방과, 혹시 집안에 없어진 돈이나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 그리고 아줌마가 아기를 버리고 갔을지도 모른다는 다소 지나친 억측까지.. 하지만 이미 진행된 억측은 점점 더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특히 TV 드라마에서 본 업둥이에 대한 기억은 그 밑그림에 채색까지 더했다. 억측이 확신으로 다가오자 은우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 사람을 들이고 졸았다가 생긴 사태에 대한 엄마의 질책이 두려웠고, 끝내 아줌마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업둥이로 남게 될 아기가 걱정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걱정은 집안에 아기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것과 업둥이를 키울 만한 형편이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했던 억측의 비약은 어느새 엄마의 질책을 넘어 버림받은 아기의 가엾은 운명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고아원?..’

  TV 드라마 채널은 이미 ‘업둥이’에서 ‘천애고아’로 돌려져 있었고, 새로운 드라마에 흠뻑 빠진 은우는 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의 불행한 앞날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측은한 마음으로 눈시울을 달구는 것이었다. 세상모르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아기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 뭐 해?

  갑작스런 엄마의 등장에 당황한 은우가 머릿속의 암전으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

  - 웬 애기야?

  엄마의 연이은 질문이 무방비 상태인 은우를 파고들었다. 

  은우는 우물쭈물하며 상황을 모면할 대답을 찾았지만, 아줌마가 돌아오지 않는 한 피해 갈 방법은 없었다.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은우의 얘길 들은 엄마는 당장 화를 내는 대신 아줌마가 없어진 지 얼마나 됐는지부터 물었지만, 얼굴엔 짜증을 누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 한 30분요?..

  은우 엄마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다 말더니, 서둘러 안방과 순미의 방부터 살폈다. 다행히 특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보이지는 않았는지, 그제서야 아기에게로 눈을 돌렸는데, 은우 엄마 역시 아기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때를 가정하고 있었다. 

  - 몇 살쯤 돼 보이디?

  - ?..

  - 엄마보다 젊어?

  - ?..

  이제 일곱 살인 은우가 또래도 아닌 어른들의 나이를 가늠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은우가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자 엄마는 비슷한 질문들을 연이어 퍼부으며 채근했지만, 그럴수록 은우의 머릿속엔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 엄머, 오셨나 보네.

  은우 엄마가 은우를 다그치던 순간에 느닷없이 나타난 혁이 엄마의 등장으로, 난처함에서 벗어난 은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은우 엄마는 미처 준비되지 못한 어색한 초면에 당황했다. 하지만 은우에게 센베이 과자가 든 봉지를 건네며 순박하게 웃는 혁이 엄마의 미소는 그녀가 잠시 사라졌던 이유를 해명하기에 충분했고, 수상한 방문자에 대한 은우 엄마의 경계감도 한결 누그러뜨렸다. 


  은우 엄마와 혁이 엄마의 대화는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순미가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을 때는 혁이 엄마도 함께 했고, 저녁상을 치우고 나서도 은우 엄마는 은우 아빠가 야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줄곧 아랫방에서 혁이 엄마와 함께 있었다. 은우 아빠가 돌아온 후에야 혁이 엄마와 떨어진 은우 엄마는 이후부터는 은우 아빠를 설득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퇴근하고 오자마자 씻지도 못하고 안방으로 몰려 은우 엄마의 설득에 말린 은우 아빠가 마뜩잖은 얼굴로 마루로 나올 때, 은우 엄마는 환한 얼굴로 이불 한 꾸러미를 들고 아랫방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은우 엄마는 냄비며 그릇, 수저에 쌀까지 나르며 혁이 엄마의 빈방 살림을 채워 주었다. 

  그날 밤 은우네 집엔 또 한 식구가 늘었지만, 은우 아빠는 기쁨보다 걱정이 더 컸던지 은우 형제가 잠든 후에도 부부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 보증금 없이 들이는 건 그렇다 해도 전과는 좀 걸리는데..

  - 그건 나도 좀 그렇긴 하지만, 나쁜 일 하다 그런 것도 아니고 택시 운전하다 실수로 친 거라잖아요. 

    젊은 사람이 안됐잖아요. 나이도 어린데 돌도 안 된 애 업고.. 시댁도 전라도라 멀어서 도움 줄 형편도 

    안 되는 것 같고, 친정은 대청도라는데 인천엔 친척 하나 없나 봐요. 남편 사정 때문에 방 구하기도 힘든가

    보던데.. 남편이 교도소에서 나와서 벌면 월세야 안 밀릴 테고, 석 달 후에 나온다니까 그때까지만..

  - 흐음~ 사람은 괜찮은 것 같아?

  - 아이, 아까 다 말했잖아요. 착하고 순진한 것 같다고..

  - 사람 겉모습만 봐서 몰라.

  - 그야 그렇지만..

  - 알았어. 일단 보자구.     


  다음 날 아침, 혁이 엄마는 은우네 정식 식구로 아침 밥상을 함께 했다. 은우 엄마는 은우 형제에게 혁이 엄마를 이모로 부르도록 했고, 혁이 아빠가 나올 때까지 당분간은 아침,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남편 면회 갈 때를 제외하곤 항상 집에 있었던 혁이 엄마는 은우 형제를 돌봐 주면서 점심도 챙겨 주었고, 자연스레 집도 봐주게 되었다. 덕분에 은우 형제는 집 걱정 없이 맘 놓고 밖에서 놀 수 있었고, 은우 엄마 역시 아이 둘만 남겨 놓은 집에 대한 불안감에서 한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혁이 엄마 들이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은우 아빠도 내심 흡족해하며 비로소 혁이 엄마를 식구로 받아들였다.

  한 달 사이에 누나와 이모가 한꺼번에 생긴 은우는 세상에 내 편인 사람 둘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빈집에서 혼자 혹은 은수와 함께 느꼈던 적막감과 무료함이 찾아들 틈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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