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오늘의 치약은 언제나 있다.

by 조혜영



편안한 주말 오후다. 모처럼 하늘도 맑고 공기도 청명하다. 이런 날은 집에만 있을 수 없어 무작정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자주 가는 서점 카페에서 레모네이드를 시켜놓고 노트북 전원을 누른다.


텅 빈 백지.


그 위에, 이제 무언가를 쓰려고 한다. 일단 레모네이드부터 한 모금 쭉 들이켜야겠다. 차갑고 상큼한 액체가 목을 통과해 온몸의 작은 세포 하나까지 스며든다. 덕분에 시야가 또렷해지는 기분이다. 목을 가볍게 돌리며 손가락을 푼다. 어깨의 힘을 빼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마음을 맞춘다.


한동안 내게 글쓰기는 일이었다. 방송작가, 프리랜서 기자 등의 이름으로 20년 가까이 글을 쓰며 돈을 받았고, 돈을 받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써지지 않았다.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었지만 알 수 없는 결핍감이 오랜 시간, 늘 가슴 언저리를 따라다녔다. 어떤 날은 가슴이 텅 빈 것 같다가, 어떤 날은 가슴이 답답했다. 어떤 요일엔 킹콩처럼 가슴을 두드렸고, 어떤 시간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을 쓰는 일이 끔찍이도 싫어졌다. 글을 쓰는 대신 말로 밥벌이를 하기도 했지만, 텅 빈 혹은 답답한 가슴에서 나오는 말은 공허한 울림이거나 혹은 소음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괴로움이 역치의 순간에 다다른 어느 봄날, 나는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덜어내기로 했다. 그것은 텅 빈 가슴을 채우는 일이기도 했다. 돈을 받는 것과 무관하게 무언가 쓰기로 한 것이다.

글쓰기와 창조성의 멘토, 줄리아 카메론의 글이 힘이 되었다.



"예술은 새로운 무언가를 억지로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을 자연스럽게 적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생각해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자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저 위에, 저 멀리, 저 높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하지만 내면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냥 적을 때는 어떤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그 일을 해주는 것이다. 새로운 무엇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 줄리아 카메론



그동안 내게 글쓰기는 다 쓴 치약을 억지로 쥐어짜 내는 행위였다. 얼마 남지 않은 치약을 짜고 또 짜내 가까스로 칫솔 위에 안착시키는 것. 이것으로 한 번의 양치질은 가능하겠구나, 하는 안도감. 다음번엔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 그리고 무리하게 힘을 줬던 탓에 밀려오는 손목과 팔뚝의 통증…….

그런데 줄리아 카메론이 말을 건넨 것이다. 글쓰기는 억지로 쥐어짜 내는 행위가 아니라고, 매일매일 이를 닦는 치약은 네 안에 언제든 있다고.


“글쓰기는 어떤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을 붙잡아내는 것이다.”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 줄리아 카메론



이렇게 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는 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생각들에 가만히 귀 기울여본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작은 골방으로 들어가 넓은 세상을 만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문을 활짝 열고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마중 나가야겠다. 낯선 나를, 그리고 낯선 세상을.


어쨌거나,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다행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