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에게 남긴 것
어느 늦은 밤,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행복’이 서있었다. 주인은 너무 반가워 그녀를 위해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행복이 말했다. ‘저의 뒷모습은 불행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함께 붙어 있는 존재라 같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데 괜찮냐고.
나는 모두와 친하지만 친하지 않은 사람이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섬세하다. 그들 모두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만, 삶에서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들에게 관심도 기대도 없다. 사랑을 못 믿어서 너무나 진실되게 품어보고 가져보고 싶어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한다. 언제나 다시 오는 불어오는 계절의 바람. 매일 눈물이 번지듯이 사라지는 해, 표정도 모양도 변하지만 나를 지켜보는 하늘. 내가 화를 내고 슬퍼해도 나를 나무라지도 않고 나에게 상처받지도 않는 존재들이 편하다.
또한, 하나를 정하면 그것을 계속한다. 내가 쥘 수 있는 한 최대로 꽉 움켜쥐고 배에 힘을 주며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소중하며 가장 증오하고 사랑하고 싶은 나를 들어 올리는 행위를 매일 한다. 어쭙잖은 자세로 왼쪽 어깨가 쑤셔도, 추운 겨울 밖에 나가서도, 새벽 3시 방문 앞 봉에 매달려서도 그렇게 매일 한다.
같은 행위를 매일 한다는 건 어떤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여전히 나는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 나는 여전히 갈망하고 소망하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렇게 매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낑낑 들어 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엔 마지막엔 어떤 좋은 것들이 남게 될 거라는 나에게 거는 주문이자 약속이다.
나는 비우는 법을 잘 모른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모두에게 착하고 순한 사람이었지만 엄마에게는 가장 못되게 굴었다. 시시때때로 소리를 질렀고 술을 사 오라고 했고 때렸고 욕을 했고, 정작 큰일이 있을 때는 이불속에 숨어 자는 척을 했다. 15살의 나는 아빠 앞에서 병나발을 불며 너 때문에 나도 술주정뱅이가 될 거라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무릎을 꿇고 빌며 본인이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했다. “입 다물어라. 입 다물어 제발.” 엄마가 더 아플까 봐, 엄마가 불쌍해서 매일 웃으며 그렇게 입 다물었다. 입 다물고 살기 싫어서 교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하는 직업을 가졌지만, 주먹을 움켜쥐고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수업을 했다. 지식을 전달할 때는 괜찮았지만 내 마음을 전해 줄 때는 식은땀을 흘리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어렵게 말을 내뱉었다. 대본을 썼고 연습을 했다.
살아오면서 그렇게 하고 싶다거나 잘하고 싶다거나 이런 것들이 크게 없었다. 좋아하는 것이 잘 생기지 않았다. 책 읽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그러다 37살 2022년 9월 30일 턱걸이를 처음 시작했다. 그리고 턱걸이를 거의 매일 하고 있다. 땀을 흘리고 탈탈 털리다 보면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이 떠내려가는 느낌이 좋다. 촘촘하게 얼기설기 엉킨 생각들이 직선을 그리며 단순해진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은 내려놓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본다.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들이 퐁퐁퐁 올라온다. 그리고 그렇게 그곳에서 변함없이 내 머리 위에 그려지는 희미하지만 선명한 무지개를 발견한다.
우리나라의 6월은 장마를 앞두고 참 덥고 습하다. 기계가 솎아낸 마늘의 흙을 탈탈 털어 대략 한 접씩 묶은 다음, 트럭에 고봉밥처럼 싣고 다시 창고로 옮기는 일은 단순하면서 참 고됐다. 장마가 와서 마늘 뿌리에 흙이 엉켜 붙기 전에 끝내야 해서 작은 손이라도 아쉬웠다. 고민하던 엄마는 파주에 있는 둘째 이모 내외를 불렀다. 당뇨가 있고 다리를 절었던 아빠는 농사철에 더 술을 마셨다. 술힘으로 일을 했다. 아빠는 둘째 이모부를 싫어했다. 서울 말씨를 쓰며 뺀질거리는 모습을 얄미워했다. 일을 마무리하고 흙 때문에 까슬거리는 밥을 늦은 저녁 억지로 넘기고 있던 날. 술 취한 아빠는 이모부에게 소리를 질렀다.
“다 필요 없다. 파주에 그냥 올라가라. 아까, 산수유나무 뒤에 가서 니랑 제부랑 뒤에서 나 오는 거 봤는데. 씨발 뭐?”
17살의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빠가 술 취해서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게 느껴졌다. 이모도 이모부도 얼굴이 불긋불긋해졌지만 엄마는 그때도 빌었다. 참아달라고 부탁한다고.
다음 날, 더워서 입맛도 없다며 짜장면 먹고 싶다고 이모부가 노래를 부르자, 엄마는 쌈짓돈을 쥐어주며 이모, 이모부, 나만 몰래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고 오라고 했다. 마늘에 붙은 흙은 털어 낼수록 훨훨 날아 새가 되어서 귓구멍, 콧구멍을 메꾸며 둥지를 지었다. 짜장면은 까매서 다행이었다. 혹시 흙이 떨어져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입안이 자꾸 까슬해지고 목이 막혔다. 왠지 눈치가 보였다. 항상 허허실실 웃기만 하던 이모부는 짜장면을 먹다 말고, 눈썹을 치켜들었다.
“어제 나 굉장히 기분이 나빴어. 나 진짜 참았어.”
고개가 자꾸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내가 그때 짜장면을 다 먹었었는지 우물우물 먹었었는지 후루룩 먹었던가 물을 마셨던가. 목구멍이 자꾸 가득 차올랐던 기억만 난다. 이후에도 마늘 작업은 계속 되었다. 더웠고 습했고 일은 단순 명료하며, 한편으로 질척거리는 것이었다. 자꾸자꾸 어지러웠다. 울렁거리고 메슥꺼움을 참을 수 없어 구석으로 달려가서 다 게워냈다. 그놈의 맛대가리 없던 짜장면을. 나는 먹기 싫었는데 먹고 싶지 않았는데 나라도 먹이고 싶었던 건 엄마 마음이지.
마늘 캐기에서 가장 힘든 것은, 트럭에 마늘을 켜켜이 쌓아 올린 다음 창고에 던지는 작업이었다. 빨리 많이 해야 했고 무거웠고 흙이 많이 날렸다. 머리가 자꾸 아팠다. 왜 항상 시험을 앞두고 마늘을 캐야 할까. 물을 마셨었나. 엄마 아빠는 새벽 5시에 일어났지. 2층 창고에 빨리 넣으려면 두 접을 한 번에 던져야겠지. 너무 높다. 저곳이 너무 높게 느껴진다.
이런 생각들이 포도송이가 되어 나에게 주렁주렁 매달렸을 때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무지개가 떠 있었다. 저 높은 하늘에 희미하면서 선명하게. 찰나였지만, 아주 오랫동안 깊이 있게 응시했다. 참 찬란하게 이쁘다고 생각했다. 그냥 아름다웠다. 내가 언제 낮에 이렇게 또렷한 무지개를 본 적이 있었던가 잠시 되새기며 이 순간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임을 미리 단정 지었다. 고개를 조금이라도 빼꼼 내밀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면 그때의 무지개가 자꾸 떠오른다. 이유는 모르겠다. 위로이자 희망이었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니까 괜찮다고 나를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몇 년 전부터 엄마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고 아프다고 한다. 수많은 이야기들은 그렇게 마음에 자리 잡아 병이 되었다. 꾹꾹 눌러 담았던 것들은 이리저리 튕겨져 올라 폭발했고 치매에 걸린 엄마는 자꾸자꾸 울고 화만 낸다. 심지어, 가족관계증명서에 자신은 없는 존재라고 그렇게 유령처럼 살아와서 힘든 일을 겪었다며 매일매일 억울하다고 한다. 그런 엄마를 보면, 엄마의 삶을 보며 세상은 불공평하며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많이 슬펐다.
전구의 불빛이 하나하나 꺼질 텐데 나를 못 알아보는 날이 올 수도 있을 텐데 예쁘고 아름다웠던 것만 가져가면 오죽 좋아. 근데 매일매일 억울하고 슬프다고만 하니 그런 아픔만 품고 기억할까 봐. 그럼 엄마 인생이 얼마나 속상해.
엄마가 나에게 남긴 건 뭘까 생각했다. 예쁜 무지개다. 너무 높아 닿을 수 없어 헐떡거리던 나에게 희미하며 선명했던 무지개.
나 턱걸이도 잘하고 웃을 때 예쁘고 사랑스럽고 이왕이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볼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는데 그거 다 엄마가 준거야. 그렇게 일하면서 자기가 못한 공부 하라고 해서 책 좋아하는 사람 되었는데 그것도 다 엄마가 준거야. 근데 그런 거 자꾸자꾸 이야기해 줘도 왜 안 들어. 엄마가 엄마 삶을 사랑해야 엄마를 닮은 나도 나를 진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잡을 수 있는 한 최대한 철봉을 꽉 움켜쥐고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증오하며 사랑하고픈 나를 그렇게 매일매일 들어 올린다. 아픈 것들이 비워지고 난 자리에 내 가슴에 새겨둔 그때의 무지개가 떠오를 것이라 주문을 걸며. 결국에 남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남길 것이고 기억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