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희로애락, 그녀들의 술

by 강작

"술 얼마나 마셔?"


선배는 물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너무 멋있어서- 나도 모르게 "선배만큼 마실 걸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멋있게 웃었다.




고등학교 때 실험실에서만 보던 알코올맛이 나는 액체를 억지로 꿀꺽 꿀꺽 삼켰다. 터질 것 같은 얼굴, 이미 혼이 나간 정신과 초점, 아직 괜찮다고 말하는 쓸 때 없는 입.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매년마다 멋있는 이성이 나타났고 그렇게 나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맥주, 소주, 소맥, 폭탄주를 차례대로 마스터할 수 있었다(술의 등급이 올라갈 때마다 사고 치는 스케일도 커졌습니다만,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술에 대한 좋은 기억은 없다. 그 멋진 선배들과 다 인연이 되지 않았다는 것도 큰 원인이었지만, 원체 알코올만 들어가면 온몸이 원숭이 엉덩이나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개지고 금방 정신이 혼미해져 결국은 좋은 꼴을 못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마신 술은 즐기기 위해서였기 보다는 '취하기'위한 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취하면 내 꼴이 어떻든 간에 용감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게 큰 화를 일으키지요).

우아한 여자에게 술은 어떤 의미였을까? 용감해지기 위해, 사랑을 얻기 위해, 슬픔을 잊기 위해 억지로 마시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술 자체를 즐길 줄 알았던 걸까. 그녀들이 마시는 와인이 궁금해졌다. 어쩌면 내가 먹던 술이 내 입맛에 맞지 않아서 즐길 수 없었을 수도 있다. 입맛에 맞는 술을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다면 술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와인이라는 것은 내게 클래식과 같다. 비싼 가격, 생소한 원산지, 향과 빛, 깊이에 따라 섬세하게 나눠지는 종류,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까지 그 모든 것이 어려운 음표 같았다. 나는 서둘지 않기로 했다. 2주일 전에 듣기 시작한 클래식도 이제 점점 관심이 커지는 것처럼, 와인도 입문한다면 푹 빠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와인을 사러 백화점에 간다는 것은 정말 나에게 생소한 체험이었다. 원래도 백화점에 잘 안 갔었는데, 술을 사러 가다니. 나는 무언가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에 '처음 와인'이라고 검색해보았다. 그 결과 나와 같이 와인을 처음 제대로 먹어보려고 하는데, 무엇부터 사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답변들을 참고해 작은 종이에 연필로 와인 이름 몇 개를 적었다. 와인 샵에 가니 한 인상 좋은 셀러가 내게 와 무엇을 찾는지 물었다. 나는 선물을 할 건 아니고, 혼자 먹어보기 위해 사는 거라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늘 낯설기만 했던 와인 셀러는 생각보다 너무나 친절하게(나를 무시하지도 않고) 여러 이유를 설명해주며 몇 개의 와인을 추천했다. 처음에는 스파클링이나 화이트 와인에서 시작해서 점점 깊이감 있는 레드와인을 마시면 좋다고 말했다. 훌륭한 셀러의 추천에 따라 나는 도수가 6도 정도인 이탈리아산 레드샴페인 와인 '간치아 브라케또 다뀌'를 샀다. 가격은 소주와 맥주에 비하면 훨씬 비쌌지만, 이 병에 들은 포도주가 내게 어떤 행복을 줄지 몰랐기에 아깝지 않았다.



와인을 예쁜 잔에 조금 따라 마셔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달콤하고 풍부한 향이 혀를 따라 느껴졌다. 이 맛을 내기 위해 따사로운 햇빛과 맑은 비, 양질의 토양이 나무에게 힘을 주었을 것이다. 나무는 그들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예쁜 포도송이를 만들고 열심히 검붉은 빛으로 물들인다. 바람이 잘했다 잘했다 잎사귀를 칭찬하면 포토송이들은 더 풍부한 향을 흘려보낸다. 와인 잔을 따라 천천히 흐르는 붉은 빛을 한참 바라봤다. 이 곳 내 안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몸이 붉어졌다. 늘 그렇듯 정신도 눈빛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취하는 과정도, 취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들은 이 즐거운 혼미의 상태로 어떤 일들을 벌인 걸까. 어떤 우아한 희로애락을 만들었던 걸까.



소심한 내가 그에게 고백할 수 있게 했던, 울면서 서러움을 털어놀 수 있게 했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춤출 수 있게 했던- 술이 주는 사랑스러운 혜택을 계속해서 즐기고 싶다. 그리고 이젠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마시는 쓰디쓴 술이 아니라, 나의 즐거움을 위해 마시는 맛있는 술을 찾고 싶다. 클래식처럼 와인과 와도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Writer. 강作

놀랍도록 많은 구독자분들이 함께해주어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글이 재미있어 계속 읽었다는 댓글들 보고 저도 눈물겹게 감동했습니다.(흑) Elegant Life 연재는 마지막 에필로그 한 회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연재가 끝난 후, 오랫동안 써왔던 연애 칼럼을 살포시 소개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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