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흑역사
그 회사는 전혀 널널한 회사가 아니었다. 사람은 적고 일은 많아서 한 사람이 결근이라도 하면 큰일 나는 무지 바쁜 회사였다. 선배들이 지각을 해도 태연했던 이유는 전날 밤 열두 시까지 야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도 내 몫을 잘 해내야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난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걸?
입사할 때 이력서에 모든 디자인툴을 다 잘 다룬다고 썼었다.
[어도비 툴 능숙도 상].
‘상’이라는 글자를 쓸 때 조금 망설여졌지만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레이어마스크가 뭔지, 그라디언트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학교 다니는 내내 툴을 켜서 뭘 하긴 했으니까 신입치고는 ‘상’ 아닐까? 처음부터 어려운 걸 시키지 않을 테니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만약 직원이 백 명이 넘고 교육 시스템이 있는 회사에 입사했다면 툴이 좀 서툰 게 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은 총 인원 5명의 초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였다. 모두가 일당백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다.
디자이너라면 이런 질문을 한 번쯤 던져봤을 것이다. ‘나는 디자인을 잘하는 편인가?’ 나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동안, 내가 디자인 감각이 있는 편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한가한 질문을 던질 겨를이 없었다. 거기에 답하기 전에 먼저 던져봐야 할 질문이 있었다. ‘나는 일을 할 줄 아는가?’
아니요. 저는 일을 하나도 할 줄 몰랐습니다.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협업자들과 소통하는 것도, 전체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일에 필요한 도구를 다룰 줄 몰랐다.
물론 일을 잘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일을 잘 하진 못해도 하긴 해야 하는 것이다. 월급을 받고 일한다면 말이다. 그림을 그리려면 선이라도 그어야 하는데 나는 연필을 쥐는 것부터 너무 서툴렀다.
진짜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이렇게 야생에 던져놓을 줄이야. 물론 회사 입장에서는 디자인도 전공했고, 인턴생활도 6개월 해 봤고, 디자인툴도 상급으로 잘 다룬다는데 당연히 알아서 잘할 줄로 알았을 거다. 다 내 탓이다. 회사를 너무 만만하게 봤다. (하지만 정말 너무 야생이었어..)
나는 5분이면 끝낼 일을 하루종일 붙잡고 있었다. 선배들이 도와주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매번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거의 매일 새벽까지 야근을 하며 일을 쳐냈다. 피곤한 건 문제도 아니었다. 진짜 견디기 힘든 건 협업자들을 원망 어린 눈빛을 마주치는 것이었다.
한 가지 상품을 만들기 위한 과정에 10명의 사람이 투입된다면 디자이너는 시간상 5번째 정도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일을 쳐내지 못하면 6~10번째 사람들의 일정이 주르륵 밀려버렸다. 컨펌 봐야 하는 팀장, 클라이언트 쪽 담당자, 교정교열자, 마케터, 인쇄담당자 등등.
나 혼자 속 편하게 야근하면 다행이지 날 기다리는 사람들을 두고 야근을 하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협업자들의 사무실도 가까워서 자주 우리 회사를 찾아왔는데 그들을 마주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내가 야근을 하면 그들도 나 때문에 야근을 했다.
6~10번째의 사람들은 내 작업물을 기다리다 지쳐갔다.
그들은 처음에는 격려를 해줬다.
“힘들죠? 여기 일이 좀 빡세요.“
며칠이 지나니 굳은 표정으로 재촉했다.
“언제쯤 될까요?"
또 며칠이 지나니 아무도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
어느 날 팀장님의 데스크톱 메신저에 적힌 내 이름을 봤다. 팀장과 친한 클라이언트사 담당자의 메시지였다.
“쓰니(나) 얘 어떡할 거야? 미치겠네!“
또르르..
자극을 받아 정신을 차려 툴을 마스터하고 디자인도 나날이 늘어서 몇 달 만에 회사의 핵심인재가 되었다고 글을 마무리하면 좋겠지만 현실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멘붕이 오고 야근에 지쳐갈수록 실수가 늘어갔다. 아래는 내가 1년 차에 한 실수들이다.
- 인쇄사고: 같은 사진을 두 개 넣음
- 광고사고: 브랜드명을 빼먹음
- 누끼사고: 누끼를 잘못 따서 사람 사진의 목과 몸통을 분리해 버림
- 오타사고: 수정 전 원고를 얹혀버림(에디터 극대노)
- 사진사고: 수정 전 사진으로 디자인해서 내보냄(포토그래퍼 극대노)
- 신발사고: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출근함(여러 번)
- 옷 사고: 옷을 뒤집어 입고 출근함(여러 번)
등등
그리고 무수한 말실수가 있었다.
일이 익숙해지기까진 6개월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익숙함'은 '일잘함'과 같은 말이 아니다. 그저 아주 많이 손이 느린 상태에서 조금 손이 느린 상태로 바뀐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약간 트라우마가 생겨서 지금도 마감시간을 지키는 것에 예민하다. 줄줄이 내 작업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고를 쳤음에도 팀장은 약간의 눈치를 줬을 뿐 자르지 않고 일이 익숙해질 때까지 놔두었다. 고맙고 미안하고 힘들었고 이게 프로의 세계인가 싶고 백만가지 감정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