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펌 대환장파티
'디자이너는 커뮤니케이션하는 직업'이란 말은 진실이다. 혼자서 샤샤샥 예쁘게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이 아니라는 말이다. 늘 관계 속에서 일한다.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0'이었던 디자이너 초반에는 멘붕에 자주 빠졌다.
잡지를 디자인하는 회사에 다닐 때였다. 그곳의 시스템은 공식적으로는 이랬다.
1. 전체회의를 통해 디자인방향을 정한다.
2. 에디터는 글과 사진을 준비해 온다.
3. 나는 글과 사진을 받아서 디자인한다.
4. 팀장에게 컨펌을 받으면 끝.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아래의 과정이 추가된다.
5. 팀장이 사진이 별로라고 한다.
6. 나는 팀장의 말을 에디터에게 전한다.
7. 에디터는 포토그래퍼에게 전화를 건다. "실장님, 혹시 이 부분 수정할 수 있을까요?"
8. 포토그래퍼가 짜증을 낸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예요?"
9. 에디터는 여러 번의 "죄송하지만" 끝에 사진 수정본을 받아낸다.
10. 사진을 교체해서 다시 디자인 팀장에게 컨펌을 받는다.
11. 팀장이 말한다. "사진을 바꿨으면 디자인도 바꿔야지."
12. 디자인 수정을 한다. 애초에 하기로 했던 컨셉은 접고 어떻게든 다시 한다.
13. 디자인이 오케이 되었다. 부장에게 전달한다.
14. 외근하고 들어온 부장이 나와 에디터를 부른다. "처음 컨셉이랑 다르잖아. 사진은 왜 이렇게 찍었어?"
15. 에디터는 포토그래퍼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실장님 죄송하지만.."
16. 나는 팀장 자리로 가서 부장의 말을 전한다.
17. 자존심이 상한 팀장이 부장에게 간다. 둘이 한참 투닥거린 후 돌아와서 내게 말한다.
18. "조율해서 이렇게 수정하기로 했어. 요기는 빼고 저기는 좀 더 늘리고. 간단하지?"
19....? ....네?
20. 바람을 쐬러 옥상으로 올라간다. 조율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21. 옥상에는 에디터가 핸드폰을 꽉 쥐고 전자담배를 피우고 있다. "포토그래퍼랑 연락이 안 돼요."
22. "힘내요"
23. 자리로 돌아와 수정을 한다.
+
여기에 '대표'와 '광고주'의 컨펌이 더해질 수 있음.
나는 꼭 마우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디자인에 대해 의견을 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는 아직 내 디자인을 설득하는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알았다면 수정을 피할 수 있었을까?
꼭 이런 시스템이어야 하는지 여러 번 의문이 들었다. 언제까지 돌고 도는 컨펌을 받아야 할까? 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려고 하면 내가 못해서 그렇지 뭐, 하는 생각만 들었다. 실력이 없다고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할 자격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땐 디자인 지적을 받으면 의기소침해졌다.
컨펌 시스템을 바꿀 방법을 찾진 못했지만 상황을 쉽게 해결하는 스킬은 쌓였다. 자주 내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을 끝까지 완성해 놓고 컨펌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어떻게 되고 있다고 결정권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작업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일일수록 자주 중간보고를 했다. 그러면 수정이 있더라도 중간 과정에서 하는 것이므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디테일하게 다듬은 완성본을 수정할 때는 가슴이 미어지니까)
중간보고가 수정을 줄여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보고를 할 타이밍을 재고, 말을 고르고, 결정권자들의 권력관계를 고려하는 등의 수고스러움도 있었다. 내 생각과 다르게 수정될수록 결과물에 애정이 안 간다는 것도 문제.
사람들과의 미묘한 관계를 잘 파악하는 능력, 매끄럽게 말을 잘하는 능력은 확실히 디자이너 생활 아니 회사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내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나는 소통라인이 짧아질수록 훨씬 일에 효율이 났다.
클라이언트사가 있는 에이전시보다 결정권이 내부에 있는 인하우스가 더, 회사보다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가 더, 프리랜서로 일할 때보다 내 사업을 할 때가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효율적'이란 말이 '성공적'이란 말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과정만 봤을 땐 시스템이 단순할수록 모든 면에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