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에서 프리랜서로
8년 차쯤 되었을 때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쁘지 않은 회사였다. 사람들도 좋았고 일도 잘 맞았다. 다만 조직생활이 싫었다.
그동안 쌓아온 사회생활 스킬이 있으니 모나지 않게 잘 지냈지만, 집에 오면 회사에서 다 써버린 에너지를 충전하느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증폭시켜 준 계기가 있었고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한다니 다들 이렇게 말했다.
“노는 것도 잠깐이지, 한 달쯤 지나면 지겨울걸?”
한동안 퇴직금을 까먹으며 게으르게 살았다. 열 시까지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한낮에 산책도 하고, 천천히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상이 정말 좋았다. 놀면 놀수록 지겹긴커녕 내가 왜 그동안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나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두 가지 마음이 내 안에서 싸웠다.
“이제 어떻게 먹고 살거야? 계획을 짜야지.”
“아무 생각 하지말고 일단 좀 더 쉬어.”
늘 두 번째 마음이 이겼다. 일단 여유롭게 푹 쉬기로 했다. 게으르고 행복한 나날이었다.
행복할수록 SNS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 당시 나는 인스타그램(개인계정)에 사진을 잔뜩 올렸다.
오전 열한 시, 집 앞 카페에서 찰칵.
오후 두 시, 집에서 토스트를 만들어 먹으며 찰칵.
오후 다섯 시, 공원 벤치에서 (사진 찍으려고 들고 온) 책을 들고 찰칵.
그렇게 놀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다 보니 전전 회사에 함께 다녔던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그만둔 지 6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첫 번째 일. 지인 회사 비정기적 출근
“야, 너 놀고 있어? 일 좀 하러 와라.”
지인은 인하우스 디자이너였다.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일을 벌이고 있어서, 늘어난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매번 바쁜 게 아니었기에 사람을 구하기도 애매해서 놀고 있는 나에게 연락한 것이다.
돈이 떨어져 가고 있어서 나는 냉큼 오케이 했다. 9시까지 출근을 해서 일해야 했다. 나는 지인이 미처 쳐내지 못한 일들을 나눠했고 그 팀의 팀장에게 컨펌을 받았다. 일이 일찍 끝나면 6시에 퇴근했고 일이 많으면 야근을 했다. 총 2주 정도 일을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야, 회사 다닐 때랑 똑같잖아?’
내가 생각하던 프리랜서의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짭짤(?)했다. 시키는 일만 하면 되니 책임감이 무겁지도 않았고 일에 비해 받는 페이도 괜찮았다. 일이 끝나고도 그곳에서 가끔 연락이 왔다.
연락은 꼭 2-3일 전에 왔다.
“이번주 금요일에 혹시 시간 돼?”
별다른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늘 오케이였다.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디자이너가 있다고 소문이 났는지 다른 지인들도 연락이 왔다.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들과 나는 서로의 니즈에 딱 맞았기에 반가워했다. (시간이 언제나 널널한 8년 차 디자이너를 찾기는 힘들다)
몇 달간은 급하게 날 찾는 지인들 덕분에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일만으로 프리랜서 생활을 채울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기다리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율적으로 내 스케줄을 짜면서 더 자유롭게 일하고 싶었다(출근하기 싫었다는 뜻).
두 번째 일. 모르는 회사 재택근무
그 일은 인터넷으로 구했다. 디자이너들이 모인 커뮤니티 게시판이었는데 디자이너를 구한다고 적혀 있었다. 포트폴리오를 내니 연락이 왔고 광화문에 있는 회사에서 미팅을 했다.
그 회사는 행사를 주최하고 관리하는 작은 회사였다. 회사 내에 내에 디자이너가 없었다.
여태까지는 내부에서 어떻게든 디자인을 해결했는데 이번 행사는 디자인이 중요해서 프리랜서를 구하게 되었다고 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하겠다고 했고 계약서를 썼다.
일은 집에서 했다. 직원들의 출근시간인 9시에 나도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메신저를 켜고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일했다. 실시간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정해진 시간 동안 할당된 일을 하면 되었다.
이 일 역시 일당으로 받기로 계약했기 때문에 9시부터 6시까지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출근하는 것보다는 편했다. 노브라에 파자마를 입고 일하다가 지겨우면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기도 했으니까.
모르는 사람과 일하는 것도 좋았다. 아는 사람과 일할 때는 일 외적으로 신경 쓰이는 게 많다. 안부도 물어야 하고, 스몰토크도 나눠야 하고, 부당한 일이 있어도 직설적으로 말하기가 힘들었다. ‘인간관계’는 내가 특히 약한 부분이다.
반면에 이 일은 그런 면에서 담백했다. 주로 메신저와 이메일로 소통했고, 일에 관한 얘기 말고는 하지 않았다. 서로 잘 알지 못하니 더 조심스럽게 대했다. 약속된 6시가 되면 내일 뵐게요, 하고 메신저를 껐다.
전반적으로 괜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좀 더 자유롭게 일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던 프리랜서의 상징은 ‘늦잠’이었는데 출근 시간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었다.
세 번째 일. 건당 페이로 계약하는 일
몇 달간 위의 두 가지 방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일을 소개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소개받은 일 중에는 출퇴근이나 재택근무처럼 ’시간당 비용‘이 아닌 ’건 당 비용‘으로 하는 일도 있었다.
하루에 00만원, 하는 식이 아니라 디자인 1건 당 00만원 하는 식이었다. 결과만 내면 내가 언제 어디서 일을 하든 상관없었다.
시간과 공간에서 앞의 첫 번째 두 번째 일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결과물에서도 내가 한 부분이 명확히 보여서, 앞의 두 가지 방식보다 포트폴리오 쌓기에도 좋았다.
작은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마무리하면 좀 더 큰일을 맡기는 클라이언트도 생겼다. 일을 하다 보니 느낀 점은, 클라이언트들이 처음 만난 디자이너에게 의뢰를 할 때 두려움을 많이 느낀다는 것이었다.
대화는 잘 통할지, 일을 끝내지 않고 잠수 타는 건 아닌지, 결과물은 잘 나올지 같은 두려움. 그래서 자신이 하나하나 컨트롤하기 힘든 ‘건 당 계약’은 소개를 통해 비교적 안전하게 디자이너를 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도 집 인테리어를 전문가에게 맡겼을 때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이 사람을 믿어도 되나, 중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돈을 두배로 올리면 어떡하나, 하자가 생겼을 때 책임을 안 지면 어떡하나 등등.
그래서 클라이언트들은 소개받은 디자이너와 원활하고 기분 좋게 일을 끝냈다면 그 디자이너와 계속 일하고 싶어 했다. 새로운 사람과 일할 때마다 ‘커뮤니케이션을 맞춰가는 에너지‘가 드는데 한 번 일한 디자이너와는 소통이 훨씬 쉽기도 하다.
위에 쓴 첫 번째, 두 번째 형식의 일에 비해서 페이도 좋고 일도 재미있고 시공간에서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책임감과 부담감이 커서 스트레스는 가장 심했다.
지금껏 해온 클라이언트 잡은 모두 위의 3가지 종류에 속한다.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지는 결정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일은 장점과 단점이 섞여 있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하거나, 부담감에 짓눌리지만 성취감이 크거나, 몸과 마음이 편하지만 돈이 적거나 하는 식으로.
지금은 장단점이 골고루 섞인 일들을 하면서, 백프로 만족스러운 일을 찾는 중이다.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맞는 방법을 계속 찾다보면 더 나답게 일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