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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슈퍼 Oct 18. 2023

디자인비 얼마에요?

내 노동에 가격 매기기


프리랜서를 시작하고 처음 맞닥뜨린 난관은 이것이다.

도대체 얼마를 받아야 하지?


한 행사의 포스터를 의뢰받고 클라이언트와 미팅을 했다. 프리랜서가 되고 난 후 첫 의뢰라 신나고 들뜬 마음이었다. 열심히 준비해서 디자인 방향에 대한 얘기도 잘 끝냈는데, 미팅이 끝날 때쯤 담당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디자인 비용은 어떻게 될까요? “


아, 그거 내가 정하는 거였어?


그때서야 깨달았다. 여태껏 내 디자인 비용을 내가 정한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연봉협상을 하긴 했지만 통보에 가까웠고 간간히 하던 외주작업도 클라이언트 쪽에서 정해진 금액이 있었다.


미팅을 하며 온갖 똑똑한 척은 다 했기 때문에 질문에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면 초보티가 날 것 같았다.


“백만 원입니다.”

그 금액이 업계 평균에 비해 많은 건지 적은 건지 몰랐다. 단지 그 일에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를 계산해 봤을 때 그 정도는 받아야 일할 수 있겠다 싶었다. 클라이언트는 별다른 반응 없이 수긍하며 서류가 필요하니 견적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견적서? 그건 또 뭐야….?


돌아가는 길에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디자인 견적서’

네이버에도, 디자이너들이 모인 커뮤니티에도 그 어디에도 내가 찾는 정보는 없었다. 나는 두 가지가 알고 싶었다. 내가 부른 액수가 적절한지, 견적서는 어떻게 쓰는 건지. 어쩔 수 없이 디자이너 지인들에게 전화를 했다.


지인 1. 중견기업에 다니는 디자이너

“혹시 견적서 써봤어?”

“안 써봤는데?“

“포스터 하나에 얼마쯤 받아야 할까?”

“글쎄.. ”


지인 2. 디자인 에이전시의 팀장급 디자이너

“선배 견적서 써봤어요?”

“회사에서 쓰지. 왜?”

“디자인 의뢰한 데서 견적서를 달래서요, 어떤 일이냐면..(장황한 설명)“

“그렇구나. 근데 회사 정보라 알려주기가 좀.”


더 물어볼 데는 없었다. 평소에 인간관계 관리 좀 할걸 그랬나..


그래서 그냥 이렇게 견적서를 적어냈다.

________

견적서

포스터 디자인: 100만 원

디자이너 000(도장 쾅)

________


돌이 켜봤을 때 백만 원이 적당한 금액이었냐 하면 그 일에 관해서는 그랬다. 일도 재미있었고, 기간도 적당했고, 독립해서 디자인하는 게 처음인 내게는 괜찮은 금액이었다.




문제는 그 일 다음부터였다. 이후에 다른 곳에서도 일이 들어왔을 때 나는 동일한 견적서를 보냈다.

‘포스터 디자인: 100만 원’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한 줄로 표현하면 안 되는 거였다. 일을 하다 보니 여러 문제가 많았다.


1. 예상보다 힘든 일일 때

생각보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 경우. 받는 돈에 비해 너무 많은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금액을 재협의할 생각을 못했다. 얼마를 더 요구해야 하는지 나조차 정리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 예상보다 간단한 일일 때

디자인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다 준비되어 있고, 준비된 재료를 예쁘게 배치만 해도 될 때. 이걸 백만 원이나 받으면 안 될 것 같았다.


3. 노출&영향력의 범위가 다를 때

그렇다고 디자인 난이도만으로 금액을 책정하기도 애매하다. 내가 힘들게 만들었다고 디자인의 영향력이 높아지는 건 아니니까. 백만 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디자인과, 열명에게 보여지는 디자인을 같은 금액으로 받아도 될까?


4. 중간에 일이 엎어질 때

프로젝트 분석하고 컨셉잡고 시안까지 여러 개 주고받았는데 중간에 프로젝트가 엎어졌다. 그러면 나는 얼마를 요구해야 할까? 그에 따른 기준이 없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 기준을 세웠다. 항목을 세부적으로 나눈 것이다. 포스터 디자인을 예로 들어 보겠다.


디자인 기획비: 아무런 가이드나 컨셉이 없이 시작할 때 책정하는 비용

시안비: 클라이언트에게 넘겨주는 디자인 시안에 관한 비용

아트워크비: 고난이도의 아트워크 작업에 관한 비용

베리에이션비: 사이즈 별 베리에이션이 필요할 때 책정하는 비용


[포스터 디자인: 100만 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_____________

견적서

디자인 기획비: 30만 원

시안비(2종): 40만 원(1종 당 가격 20만 원)

아트워크비: 20만 원(일러스트레이션 등)

베리에이션비(1종): 10만 원(1종 당 가격 10만 원)

_____________


위의 금액은 쉬운 예를 위해 100만 원으로 책정한 것이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책정하면 된다. 중요한 건 일을 세부적으로 나누고, 비용에 대한 근거를 세우는 것이다. 


기획에 힘이 들어간다면 기획비를, 시안을 여러 개 만들어야 한다면 시안비를 올리면 된다. 낮출 때도 마찬가지. 베리에이션이 없다면 베리에이션비를 빼고, 기획이 필요 없는 단순 작업이라면 기획비를 빼면 된다.


아트워크에 대한 기준도 더 세부적으로 나눌 수 있다. 수작업, 일러스트레이션, 사진촬영 등 항목을 세부적으로 나눠 그에 따른 금액을 책정할 수도 있다. 금액을 높일 때도 낮출 때도 똑같다. 이 항목들은 가격을 정할 때의 기준이 된다.


클라이언트와 협의하기도 편하다. 항목을 세부적으로 나누면 클라이언트도 마냥 가격을 깎아달라고 하기보다 시안 개수나 베리에이션 항목을 줄이는 식으로 합리적으로 가격 조율을 할 수 있다.


프로젝트가 중간에 엎어지더라도 내가 진행한 만큼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 세부항목이 없다면 기준이 없어서 소통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나는 클라이언트가 1인 자영업자건 큰 기업 기관이건 상관없이 동일한 가격을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디자인에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가 비용의 기준이었다.


하지만 전체 예산과 디자인이 미치는 영향력을 비용의 기준으로 잡는 디자이너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클라이언트나 디자인의 파급력에 따라 비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건 각자의 판단에 따라 적용하면 될 것 같다.




디자인 비용의 업계 평균가격이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다. 주변 디자이너들이 받는 비용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디자이너마다 프로젝트마다 편차가 매우 커서 평균가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내가 분명한 건 내 디자인 비용에 근거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클라이언트를 설득시킬 수 있으니까. 설득의 첫 번째 단계는 내 노동력을 잘게 쪼개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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