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 방패이기를 거부한다
옛날 옛날에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야기하기 쉽도록 왼쪽 나라와 오른쪽 나라라고 하자. 오랫동안 두 나라의 국력은 비슷했다. 군사력도 큰 차이 없었다. 그러다 오른쪽 나라에 기근이 찾아왔다. 더 나쁘게도 기근은 2년 동안 이어졌고, 굶어 죽으나 전쟁으로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화전론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고, 협상을 벌여볼 수도 있었을 텐데 오른쪽 나라는 전쟁을 선택했다. 그렇게 시작된 거다.
오른쪽 나라 간절함이 커서였을까, 왼쪽 나라 방심이었을까 초반 전세는 오른쪽 나라에 우세했다. 오른쪽 나라는 관문 몇 개를 뚫고 수확을 앞둔 들판에서 마음껏 곡식을 거둬들였다. 급한 배고픔을 해결하고 나니 욕심이 났다. 오른쪽 나라는 전쟁을 계속하는 걸 택했다.
왼쪽 나라는 방어에 온 힘을 기울였지만 늘 위태로웠다. 그러자 평화로운 시기에 일찍 은퇴했던 뛰어난 명장이 나라의 부름으로 돌아왔다. 전쟁의 양상은 금세 달라졌다. 오른쪽 나라는 차지했던 관문을 잃고 후퇴해야 했다. 얼마 후에는 본래 국경선까지 밀려났다. 왼쪽 나라의 명장은 더 밀어붙일 수도 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 국민의 두려움이 커지고, 병사의 피해 역시 늘어날 염려에서 진군을 멈추고 국경 수비에 힘을 쏟는다.
이쯤에서 오른쪽 나라가 종전 혹은 화해를 요청했다면 충분히 받아들여졌으리라. 그러나 오른쪽 나라는 이미 침략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달콤한 곡식의 맛을 알아버렸고, 다음 수확기까지 버틸 곡식도 없었다. 발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난타전이 계속됐다. 왼쪽 나라의 왕은 평화를 사랑했다. 어느 쪽도 더 이상 다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전세가 유리함에도 화해를 청하고 전쟁을 멈추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이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른쪽 나라에서는 또 다른 조건을 제시하며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그때는 전쟁을 그만두겠다고 한다.
요청은 가당찮게도 두 가지나 됐다. 첫째, 명장을 장수 자리에서 해임하고 자연인으로 돌려보낼 것. 둘째, 다음 수확기까지 버틸 수 있을 만큼의 곡식을 무상으로 빌려줄 것. 둘 다 말도 안 되는 조건, 지나친 요구였다. 그러나 왼쪽 나라의 왕은 고민한다. 하나는 누구를 죽이라는 것도 아니고, 자연인으로 돌리라는 것뿐이니 들어줘도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거였고 또 하나는 곡식 전량은 아니더라도 요구의 절반 정도는 도와줄 여유가 있으니 국민을 위해서 우선 전쟁을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그랬다. 오른쪽 나라는 왕의 성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 자비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 곡식을 얻음과 동시에 여차하면 군대를 몰아 국경 너머를 노려볼 요량으로 명장의 해임을 요구했던 거다. 그야말로, 백성을 볼모로 삼아 자국의 욕심을 채우려는 비겁하고, 비열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왼쪽 나라 왕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오른쪽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건 당신의 상상에 맡겨두기로 한다.
왼쪽 나라 왕은 오른쪽 나라의 요구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이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요구를 거절하고 군대를 몰아 오른쪽 나라를 점령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한다면 많은 피와 오랜 혼란을 견뎌내야만 하게 된다. 가장 좋은 건 서로 피 흘리며 다투지 않는, 평화였으므로.
옛날 옛날이야기다. 두 나라는 지금은 없어졌고, 국경도, 국민도 다 달라졌다. 하지만 비슷한 일은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지금부터 몇 가지를 적어볼 테니, 비슷한지 아닌지 가늠해보시라.
국회의원은 국민을 방패 삼는다.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까지 '국민 투표로 선출되었다는 권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뜻을 거스르는 건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거라는 논리다.
대기업은 직간접으로 고용 관계에 있는 국민들과 국가 경제를 방패 삼는다. 대기업에 불이익을 주려 한다면 고용 축소, 투자 철회, 사업체 해외 이전 등 국가 경제와 국민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유치원은 아이들을 방패 삼는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국민들이 일하러 나가 있는 동안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겠냐는 논리다.
부정을 저지른 기업은 투자자를 방패 삼는다. 국가가 국민인 투자자의 이익을 지켜주지 않는 건 옳지 않다는 논리다.
의혹이 있는 판사는 삼권분립의 원칙과 헌법을 방패 삼는다. 한 번 원칙이 흔들리면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갈 거라는 논리다.
피의자는 가해자의 인권을 방패 삼는다. 가해자 역시 보호받아야 할 국민이라는 논리다.
그 밖에도 너무 많다. 너무나 많은 순간 국민은 누군가의 사적 이익을 보호하는데, 범죄 사실을 감추는데, 면죄부를 삼는데 방패로 쓰인다. 때로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달려가 방패가 되어주기도 한다. 이익이라는 꿀을 건네며 자신들의 외벽으로 삼을 '국민들'을 끌어들이는 거다.
이 사례들의 결론은?
하나로 말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아무 것도 바꾸지 말라."
그래야 할까?
아니면 그렇게 되고 마는 걸까?
사실 방법이나 목적이 빤히 들여다 보이더라도 막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기에 최대한 살피고 조심해 누군가의 방패로 쓰이지 않도록 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익이란 달콤하기 마련이다. 나라를 팔아버린 이완용 등 매국노들의 논리도 그랬다. "이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더 이익이 된다. 특히 나에게." 현실이 그 생각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친일파와 친일파 자손들은 큰 재산을 갖고, 사회 고위층에서 권력을 쥐고 나라를 쥐락펴락 한다. 독립 운동가들은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가 부지기수일 테고, 알려졌듯 대부분이 부유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차라리 그들의 방패가 되어 나 하나의 이익을 찾겠다."라고. 나 하나 잘 살면 다 된 거라고 말이다. 나는 그런 생각, 태도를 부정할 수 없다. 부정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잘 살고 싶은 건 당연하고, 편안해지고 싶은 건 본능이다.
다만, 나는 나 스스로 그들의 방패가 되기를 거부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 스스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방패가 되고 있다면 그 방패 역할을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기에 '우리' 역시 그들의 방패가 되기를 거부한다고 말하려는 거다.
너무 오래, 너무 많은 경우에 잘못이 받아들여지고, 무마되어 왔다.
그렇게 많은 학교가 정의와 정직을 내세워 학생을 가르쳤어도 정의롭고 정직하기만 했다가는 비웃음을 사기 일쑤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기에 사람들은 정의롭기를 그만두었고, 정직한 사람을 미련하다 말하게 되었던 거다.
나는 내가 완전히 정의롭고, 절대로 정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정직한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생길 것이며, 항상 정의롭기엔 용기가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추구하고 바라는 건 덜 정의롭고, 덜 정직해지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지 않는 것. 적어도 내일의 내가 어제나 오늘의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살아내는 거다.
나는 나의 뜻과 다른, 의지에 반하는 이들의 방패이기를 거부한다.
나는 작은 존재다. 내가 지킬 수 있는 건 많지도, 크지도 않기에 지키고자 하는 것만을 지키기도 버겁기만 하다. 모든 걸 지켜내겠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은 품어본 적도 없고 품을 예정도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스스로 너희 힘으로 싸우길. 인질도, 포로도, 볼모도 잡지 말고 스스로 피 흘리길. 그렇게 싸워 얻어낸 승리라면 나의 뜻과 다르다 해도 인정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옛날 옛날이야기는 옛날 옛날이야기로 남겨두자. 새 이야기를 쓰기도 모자라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