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 지나, 가을밤 깊어.

기억을 소환하는 냄새에 대하여.

by 가가책방
KakaoTalk_20190913_194242856.jpg
KakaoTalk_20190913_194249111.jpg
가을 꽃의 낮과 밤

그러고 보니, 어린 날 여름은 모기향 냄새로 시작되고는 했다.

이르면 유월, 늦으면 구월까지 그 냄새는 한 계절을 가득 채웠다.

한 계절이라고 하면 너무 과소평가하는 기분이다. 어쩌면 유년의 열둘 혹은 열세 계절을 채웠을 그 냄새가 시간을 한참이나 뛰어넘어 한 계절의 끝을 소환하고 있으니까.


모기를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나이가 들어 모기가 왜 동물의 피를 빨아야만 하는지 그 피할 수 없는 숙명 혹은 저주의 근원을 알게 된 다음에도 용서하기 힘들었다. 빨갛게 피를 채운 배를 보면 시원하게 복수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만큼. 종종 복수는 처참한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해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벽지에 남은 검은 얼룩은 어느 여름 나 혹은 누군가의 피를 빨았을 이름 없는 모기를 오래 기억하게 했다.


이르다고 해도 추석이다.

가을이 제법 깊었다는 얘기다.

햇밤이 나고, 이른 데는 곧 벼를 벨 거라고도 한다.

가을이다.


며칠 비워둔 책방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맞아준 건 꽃향기다.

가을이 되어서도 피는 꽃을 보는 건 제법 낯선 경험이다.

물만 부어주면 꽃을 피우는 화분이라니.


그다음으로 맞아준 건 커다란 산모기다.

시커먼 외모에 꼬리에 흰 줄을 긋고 다니는 깡패 같은 녀석이다.

책방에 갇혀 며칠 굶주린 탓에 인간의 몸이 뿜어내는 이산화탄소에 끌려 주위를 자꾸 맴돌았다.

쫓아버리려다 결국 잡아버리기로 한 건 그 필사적인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탓도 있다.

필사적으로 인간의 피부를 찾는 그 날갯짓이 필연적으로 내 피부를 꿰뚫고 말 것 같았으므로.

여섯 번 혹은 일곱 번은 헛 손뼉만 쳤다.

그 사이 모기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고, 한때는 그냥 멀어진다면 보내줄 마음도 먹었다.

하지만 모기는 기어코 돌아왔다.

마치 이 가을의 끝에, 내 손안에 걸려들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실상은 전혀 다를 거라는 걸 안다.

모기는 월동을 한다.

어느 따뜻한 굴이나 하수구 안에서 겨울을 난다.

그 겨울을 견뎌낼 연료와 겨울을 견디고 난 후 최초의 알을 낳을 에너지를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는 걸 안다.


물었던 모기든 물으려 했던 모기든 그저 실내를 날아다니는 모기든 용서한 적이 없다.

놓치고 분해한 적은 있어도 잡을 수 있으면서 보내준 적도 없다.

이번도 다르지 않았다.

기어코 내 손에 걸려들고 말았다.


한 건 해결했다는 생각으로 방심하고 있을 때, 왼쪽 팔뚝에서 가려움을 느꼈다.

잠깐 긁다 걷어보니 모기다.

작은, 아마도 검기도 흰 줄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보다 한참 작아서 팥알 같을 모기일 거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데다 장애물도, 숨을 곳도 많은 책방이라 잡기를 반쯤 포기했다.

어떤 의미로는 반쯤은 용서한 셈이다.


굶주린 모기가 그런 사정을 헤아릴 리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이번엔 발목을 물렸으니까.


불끈 화가 났다.

이 모기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전에 있던 모기약은 다른 데에 보내버리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모기향을 피우게 되었던 거다.


모기향을 막 피워놓고 오래전 기억을 떠올릴까 말까 할 때 오미리는 될까 싶은 까만 날벌레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손이 모였다.

철썩 이었나 찰싹 이었나 짝이었나 기억할 수 없지만 펼친 손바닥에 모기가 있었다.

살짝 비친 붉은빛은 내 피가 분명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모기향을 꺼도 됐을 텐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신 모기향이 소환한 오래전 여름의 기억을 적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동안에는 모기도 크게 기승을 부리지 않는다.

고이기 충분한 비가 자주 오갈 때, 유난하다 싶게 모기가 귀찮게 구는 거다.

본디 추석 즈음이면 서리도 내리고 날도 차서 모기와 실랑이할 일이 많지 않았다.

올해는 절기도, 날짜도 빨라서 이른 추석을 맞느라 모기도 함께 맞이한 것뿐이다.

내년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내년에도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년의 일이니 내년에 생각하기로 하고.


덕분에 가을 깊어가는 날에 어린 여름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 다행이구나 한다.


좋은 냄새에만 기억이 숨어있는 건 아니다.

한 번도 좋아해 본 적 없는 '무엇이든' 추억으로 만드는 게 시간의 마법이고.

KakaoTalk_20190913_194245006.jpg
KakaoTalk_20190913_194243870.jpg
아이들도 사진 찍는 줄 안다

쓸쓸하기 충분한 저녁이다.

하지만 꽃이 있고, 기억이 있고, 고양이가 있고, 사람들이 있어 오히려 즐겁다.

얼마나 오래 이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를 기다리고, 기억을 소환하는 이벤트와 만나게 될지 알지 못하지만 충분히 음미할 수 있을 만큼, 부족함 없을 만큼은 남아있으리라고 믿는다.


밤은 깊다.

그러나 채우기 부족함 없고, 길어 올리기 모자라지 않다.

모인 이들 함께, 추억을 나누는 밤이길.

KakaoTalk_20190913_205135018.jpg 가가책방의 밤, in gongju-si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