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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출구

당연한 건 없다

by 가가책방

식은 죽 먹기란 말을 아는가. 이 말의 의미를 얘기하는 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너무나 손쉬운 일, 간단한 답이라 진지하게 묻기라도 하면 장난하느냐며 기분 나빠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당연한 일이 세상에 있을까. 길지 않은 삶이지만 감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같은 맥락에서 감에게 식은 죽 먹기란 말이 식은 줄 알고 경솔하게 먹으려다 입안을 다 데이는 일을 당하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경고로 해석되던 시기가 있었다.

한 때 감은 순진했다. 국산이라고 쓰여있으면 국산인 줄 알았다. 직접 만들었다고 말하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직접 만든 줄 알았다. 드물게 몹시 갖고 싶은 걸 발견했는데 가격이 비싸면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는 당연한 수고와 노력이 들었을 거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국산이라고 쓰고 외국산을 팔거나 직접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포장과 가격만 스스로 달았을 거라는 상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감의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 대개 그랬다. 혼자 먹으면 미안해하고 다 가져가서 버리기보다 나눠가졌다. 아버지가 그랬고, 어머니도 그랬고,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그랬다. 다들 순진했다. 그래서 잘 못 살았다. 말이 없었고 말을 못 했다. 순진하다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니었다. 속셈도 하고 적당히 꾸밀 줄 아는 사람이 잘 살았다. 드물게 순진한 채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건 스스로 완성한 삶이라기보다 사랑의 결과였을 거였다. 사랑하고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는 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도 되는 특별한 혜택. 누구에게나 주어질 삶은 아니었다.

식은 죽 먹기라는 식으로 말하며 제안하는 사람들, 자기만 믿으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믿어서는 안 됐다. 감이 스물한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우연히 친목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셋이었는데 하나는 감보다 열 살이 많았고, 다른 하나는 여섯 살이 많았으며, 마지막 사람은 세 살 어렸다. 네 사람은 몇 번인가 모임에서 보고 알아가다 뜻밖의 순간 의기투합에 이르렀다. 시작은 열 살 많은 사람의 제안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도권 근교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게스트하우스 근처에 큰 호수가 있는데 사람들이 종종 여행을 온다고. 여행자에 비해 묵을 곳이 드물어 큰 투자 없이 괜찮은 수익을 내고 있다고 했다. 계속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는데 꼭 한 번은 게스트하우스를 열어보고 싶던 지역에서 기회가 생겨서 옮길 준비를 하고 다는 거였다. 그는 지금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의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옮겨갈 공간의 보증금을 채울 수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정리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감과 다른 두 사람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인수를 제안했다. 감은 수도권 근교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자신을 상상해보려고 했다. 될 리가 없었다. 여섯 살 많은 사람은 적극적이었다. 소설가를 지망하며 유명 작가에게 배우고 있다는 세 살 어린 사람은 반년 후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데 손님이 없을 때나 여행자를 기다리며 소설을 쓰고 창작을 하는 작업실을 겸하면 좋겠다며 꿈에 부풀었다. 감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뭔가 납득하지 못하는 분위기인 감에게 열 살 많은 사람은 다시 제안했다. 자신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가보자고.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다며 바로 출발하자고 했다. 감은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저 따라가서 둘러보고 오면 되는 거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실제로 별로 바쁘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소보다 늦게 오는 감을 걱정하겠지만 큰 일은 아닐 거였다. 감은 휩쓸려 가는 줄도 모르고 스스로의 의지로 걷고, 차를 옮겨 타고,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열 살 많은 사람의 말처럼 게스트하우스까지는 두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근처에 식당도 몇 군데 있고 버스가 드문 탓에 보통 30분은 걸린다지만 호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게스트하우스가 훌륭했다. 감은 그렇게 멋진 이층 집을 처음 봤다. 감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은 부모님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 겨울에는 찬 바람이, 여름에는 무더위가 스며드는 허술한 공간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은 번듯하긴 해도 반지하였다. 빛이 들긴 하지만 습기도 함께 들었다. 그런 집만 보다 한갓진 동네에 서양식으로 지은 집을 보니 외국에 온 기분이었다. 감은 문득 이 년이나 삼 년쯤 이곳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쓰고 싶은 걸 써보는 삶도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둔 한 방에 넷씩 머물 수 있는 도미토리 게스트하우스의 운영자. 잘만 운영하면 수익도 내고 무엇보다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명함에 무슨무슨 게스트하우스 운영자라고 적혀있으면 운치 있을 것 같았다. 감은 상상했다. 밝고, 잘 풀리고, 원만하게 돌아가는 미래를.

며칠 후 감은 늘 그랬듯 스스로 책임지기로 하고 하나의 선택을 했다. 다음 학기를 등록해야 한다며 아버지에게 등록금에 걸맞은 돈을 부탁했다. 등록금을 내기엔 조금 이른 시기였지만 아버지는 전화를 끊고 얼마 안 지나서 돈을 부쳤으니 확인해 보라고 전화로 말했다. 감은 그 돈을 여섯 살 많은 사람에게 보냈다. 게스트하우스를 인수하는 계약금이었다. 셋은 일단 감의 돈으로 계약금을 치르고 그 사이에 여섯 살 많은 사람이 주변 사람에게든 가족에게든 대출이든 알아봐서 잔금을 치르기로 했다. 처음에는 감과 여섯 살 많은 사람이 주로 운영하다 반년 후부터는 세 살 어린 사람이 운영을 책임지기로 했다. 운영을 책임질 예정이고 아직 어렸으므로 계약금과 잔금은 부담시키지 않았다. 감은 스스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어른이라면 어린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게 당연한 이치였으므로.

계약은 이루어졌다. 열 살 많은 사람은 가계약을 하자마자 자신이 옮겨갈 지역에서 처리할 일이 제법 많으니 대신 운영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이때부터 감의 귀가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도 생겼다. 청소와 주변 정리가 고됐던 탓에 학교에 가던 날에 늦게까지 잠을 자기도 했다. 할머니는 걱정하는 기색으로 감을 살펴봤지만 별 말은 없었다. 감은 알아서 잘하는 사람이므로, 감도 할머니도 그렇게 믿었으므로. 가계약 후 두 달이 지났다. 여섯 살 많은 사람은 잔금을 마련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며 얘기를 좀 나누자고 했다. 감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자신 있게 말했으므로,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책임을 잘 지는 게 당연하므로, 얼마나 큰돈인 줄도 모르고 마련하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흔들렸다. 잔금을 마련하는 일로 셋은 조금 다퉜다.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다툼이었다. 돈을 더 마련할 수 없겠느냐는 말에 감은 방법이 없다고 했다. 등록금을 내야 한다고 아버지를 속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다고만 다시 못 박았다. 작가를 꿈꾸며 제법 유명한 작가 아래에서 배운다기에 제법 여유로운 줄 알았던 세 살 어린 사람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장 먼저 연락이 끊어졌다. 잔금일이 다가올수록 여섯 살 많은 사람은 감에게 의존하는 말을 더 자주 했다. 감은 처음으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잔금을 책임질 수 없으니 계약금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마지막 책임이라고 자신은 이제 모르겠다고 통보하고 연락을 받지 않았다. 모임도 나가지 않았다. 마주칠까 봐 겁이 나 한 동안 비슷한 모임을 모두 그만뒀다. 반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한 달만이었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았다. 식은 죽인 줄 알았던 수증기 하나 없는 죽이 사실은 몹시 뜨거울 수도 있었다. 들여다보고 되짚어 보는 습관을 버려서는 안 됐다. 문은 뒤에 있다. 언제나 곱씹고 돌아본 경험의 뒤에.


2025. 07. 31. 16:52-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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