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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출구

드러난 두려움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by 가가책방

잘 못 사는 것과 잘못 사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 시대다. 잘 못 사는 것보다 잘못 사는 게 낫다는 자포자기와 잘 못 살 바에는 잘못 사는 게 낫다는 생각도 흔하다. 사람으로 살면서 비인의 시대를 견디는 방법이 귀한 지혜처럼 돌아다녔다. 순진하다는 말이 비웃음 섞인 조롱이 됐고, 순진하다는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는 사람을 우습게 봤다. 책임지지 못하는 삶이 허다했다.

감은 수업료 삼백 만원을 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감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기만이라거나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를 막연하게 욕심낼 때 흔히 일어나는 실수였다. '이 정도면 내 책임은 다 했으니 남은 일은 함께 하기로 한 사람이 감당하겠지'라는 생각은 낙천이 아닌 안이함이었다. 뭔가를 함께 한다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고 분명하게 책임을 정해야 했다. 서로를 믿고 기대하되 자신에게나 상대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왜 할 수 없는지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얘기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서로 돕는다는 '협協'자에 힘이 셋이나 담겨 있으며 더하기 부호를 닮은 글자가 있는 이유는 그만큼 뭔가를 같이 할 때 큰 힘이 필요하기 때문일 거였다.

감은 바쁘게 지냈다. 아르바이트를 두 개씩 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으며, 아침에는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늦은 시작이었다. 열 살 무렵 어느 해수욕장에서 파도에 휩쓸려 깊은 데로 끌려들어 갔다가 죽을 뻔 한 이후로 늘 물을 무서워해서 가까이 가지 않았다. 누군가 수영할 줄 아느냐고 물을 때마다 우스개처럼 '난 물에 뜨지 않는다'며 바다에서조차 가라앉을 뻔했던 얘기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그런 생각들을 심리학에서 방어기제라고 부른다는 것도 이때 알았다. 감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던 건 자신의 몸이 물에 뜬다는 사실이었다. 강사가 말하는 대로 몸에 힘을 빼고 숨을 참고 가만히 누웠을 때 처음에는 가라앉는 느낌에 당황해서 여러 번 물을 먹었다. 몸에서 힘을 빼라는 강사의 말이나 긴장하지 말라는 말은 몸이 물에 뜨는 사람들에게나 맞는 말이라며 속으로 욕까지 나왔다. 몇 번이었을까, 강사는 끈기가 있었다. 함께 수영을 배우는 같은 반 사람들도 처음 보면서 왠지 응원하는 눈으로 슬쩍슬쩍 쳐다봤다. 누구도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두려움에 다치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아서 다치는지도 몰랐다. 귀에 물이 닿는 걸 겁내지 말라고 했다. 잠시 얼굴이 물에 잠겨도 놀라지 말라고 했다. 물 안경이 도움이 됐다. 물속에 빠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거였다. 감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가슴에 작은 풍선을 하나 끌어안는다는 느낌이었다. 팔은 살짝 몸에서 떨어뜨렸다. 언제든 물을 움켜쥘 수 있도록 손바닥은 펴서 아래로 향하게 했다. 감은 숨을 참고 물 위에 누웠다. 뒷 머리와 귀가 잠기는 게 느껴졌다. 눈은 감지 않았다. 수영장의 천정은 비슷비슷한 모양의 연속이라 더 가라앉거나 떠오른다는 감각은 없었다. 잠겼던 귀가 물에서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사이가 무척 길었다. 떠오른 몸은 다시 가라앉지 않았다. 감은 자신이 물 위에 떠있다는 걸 알았다. 적어도 숨을 참고 있는 동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남은 건 숨을 쉴 때도 가라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거였다. 감은 하나씩 배웠다. 감이 얕은 물에서 간단히 빠져 죽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데는 반년이 걸리지 않았다. 10년이 넘은 두려움조차 반년의 노력을 견뎌내지 못했다.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아서 다치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흔했다. 수업료는 고작 사십만 원이었다. 감은 어떤 두려움은 돈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단서뿐인 막연한 생각이었으므로 조금 더 알고 배워야 했다. 감은 두렵거나 꺼려지던 일들을 되짚어보며 기록하기 시작했다. 일기인지 성찰집인지 모를 기록의 시작이었다.


2025. 08.02. 15:0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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