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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출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가가책방

여름 한가운데 와서야 감은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세상을 떠난 지 반년 만이었다. 이상한 건 함께 살았던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그리웠다는 거였다. 감은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가 그리웠다. 열두 살 무렵이다. 무슨 기념인지 잊어버린 이유로 아버지는 백과사전을 세트로 사주셨다. 동화책도 아니고 위인전도 아닌 백과사전이었던 건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다는 방문 판매 업자의 말 때문이었다. "앞으로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다"거나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백과사전을 펼쳐보면 나중에 편하다"거나 하는 장점이 아버지의 귀에 흘러들어 홀려버렸다. 배움, 공부, 지식. 모두 아버지가 목말랐으나 충분히 마셔본 적 없는 세계의 단어였다. 아버지는 자기 배를 채우는 것보다 자식의 나중이 든든하기를 바랐을 거였다. 부피가 크다거나, 무겁다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에 진실이라 믿었던 사실들이 거짓이거나 잘못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한다는 경험은 못 본 척했다. 기도라거나 기원이 담긴 통 큰 선물이 도착한 밤, 아버지는 이웃 형님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완전히 취해서 돌아온 아버지는 감을 앉혀놓고 한참을 울었다. 할아버지도, 친척 어른들도 남자들이 다들 일찍 세상을 떠났다며 당신도 그럴까 봐 두렵다며 울었다. 그날 감은 아버지가 우는 걸 처음 봤다. 어쩌면 할아버지도 어린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렇게 울었을지도 몰랐다.

여름은 하루하루 뜨거워졌다. 마치 조금씩 태양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는 것만 같았다. 무더위 속에서는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땀이 났다. 가끔은 몸이 불타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했다. 만약 몸이 불타지 않는 이유를 찾으라면 온몸에서 흐르는 땀 때문이라고 말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흘렀기 때문인지, 땀을 흘렸기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턴가 감은 딱딱해졌던 마음이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슬픔이 밀려왔다. 눈물이 났다. 소리 내서 울었다. 감은 이상했다. 가까운 할머니의 죽음보다 까마득한 할아버지가 더 그리운 이유가 뭘까. 가까운 것보다 큰 먼 것이 뭐가 있었더라. 감은 문득 아버지가 사준 백과사전 속 별 이야기가 생각났다. 태양이 거대해 보이고, 몹시 뜨거워 보이지만 우주에는 태양보다 수십, 수백 배나 더 큰 항성들이 존재한다고 했다. 어떤 항성은 빛의 속도로 달려와도 100년 넘게 걸릴 만큼 먼 곳에 있다고 했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모두가 태양과 같은 항성이라고 했다. 무엇보다 충격이었던 건 그 별 중에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별도 있다는 얘기였다. 오늘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빛이 100년 전 내보낸 빛이라니. 사진 속에 남은 부모님의 젊은 얼굴과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아버지보다 젊은 할아버지의 환한 웃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가슴이 먹먹해 왔던 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음을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할머니가 떠나고 혼자 남았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오래전 젊은 얼굴의 아버지가 이웃 형님의 장례식에서 잔뜩 취해 돌아오던 밤, 처음 본 아버지의 울음과 그런 아버지의 울음을 닮았을 할아버지의 울음이 나란히 달려왔다. 감은 비로소 자신이 그리워했던 건 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리워할 수 있지만 그 그리움은 알고 있는 누군가의 기억에서 오는 거였다. 감은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을 잊지 않았다. 그날 아버지가 끌어안고 울었던 건 어린 자식이면서 어린 날의 아버지였는지도 몰랐다. 다시는 안아 볼 수 없는, 안아 본 기억조차 까마득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닮은 얼굴로 울고 있었을 것이다. 감이 아는 할아버지는 단 한 장 남은 독사진 속 젊은 남자의 얼굴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은 할아버지가 몹시 그리웠다. 감은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2025. 07.30. 23:08-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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