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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출구

잘못짚었으면 돌아가야 한다

by 가가책방

감이 이미 늦어버린 점심을 궁리하고 있을 때다. 혼자 지낸다는 건, 홀로 일한다는 건 점심이나 저녁때를 놓치지 않고 챙기거나 메뉴를 정하는 일을 대신해 줄 사람도, 함께 감당해 줄 사람도 없다는 의미다. 가끔 허기가 져도 끼니를 거르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배고픔을 참는 게 메뉴를 고르는 것보다 수월한 날이 드물지 않았다. 편의점이 좋을지, 자주 가는 식당이 좋을지를 두고 마지막 결정을 고심할 때 전화가 걸려왔다. 낯선 번호, 밝은 목소리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감이 운영하는 공간을 빌릴 수 있는지 물었다. 감이 '저는 공간을 대관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자 여전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무슨 위원회 로케이션 신청 페이지에서 목록을 확인하고 전화한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시 한번 감이 '나는 등록한 내용이 없으며 어떤 과정에서 목록에 올라간 건지 알지 못하지만 대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자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감은 어떤 내용인지 자신이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을 동원했다. 목소리가 언급한 기관인지 단체의 이름과 워케이션인지 로케이션인지 하는 프로그램 이름과 함께였다. 삼 분이나 오 분 정도 소득 없이 지지부진한 발견을 계속하던 중에 다시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다른 번호였다. 신중한 목소리는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말했다. 감은 앞서 전화한 확신에 찬 목소리가 거절당한 내용을 신중한 목소리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떠올렸다. 편의를 제공하는 편이던 갑은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 을이 되어 병 정도 되는 감에게 내용 확인과 메시지 전달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신중한 목소리를 파견 보낸 거겠지. 앞선 확신에 찬 목소리의 실패와 민원이 없었다면 지금은 신중한 목소리도 확신에 차서 문의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지만 결국 감은 상상할 수 있을 뿐 확인할 수 없었다. 신중한 목소리는 목소리답게 제법 자세하게 내용을 전달했다. 감은 확신에 찬 목소리에게 한 말과 같은 말을 돌려보냈다. '원칙적으로 공간을 대관하지 않습니다'. 알겠다는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2분도 지나지 않아서 신중한 목소리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더 신중해진 목소리로 이전에 전달하지 않았던 내용을 확인해 주었다. 감이 떠올렸던 것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가 신중한 목소리에게 문의를 한 내용 확인이 먼저였고, '나는 스스로 대관 가능 공간으로 신청 혹은 등록한 적이 없으며 수년 전 몇 차례 영상학과 학부생의 졸업 작품을 공간에서 찍은 적이 있어서 그때 임의로 등록된 게 아닌가 싶다'는 감의 말에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보이지 않도록 처리해 드릴까요?"라는 실무자 다운 질문을 던졌다. 감은 "네"하고 답하고 신중한 목소리는 알겠습니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감은 확신에 차서 '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 보니 조금 망설이는 목소리로 '네'라고 했던 것 같았다. 공간을 유명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린다거나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막아버린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어떤 이야기의 일부 거나 영상의 배경으로나마 기록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한 오늘의 선택을 언젠가 후회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었다. 박제에 불과할지라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가보지 않은 선택지 뒤의 가능성이었다.

박제는 원형의 보존인가. 감은 오래전 친척 집에서 본 날카로운 부리와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매가 생각났다. 매는 박제로나마 남고 싶었을까. 자연사였다면 매에게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아마 자연사는 아니었을 것이므로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카로운 부리로 물려고 하거나 나뭇가지 대신 얼굴을 움켜쥐려 달려들지도 몰랐다. 박제는 아니야. 그건 아니지. 감은 고개를 흔들며 속엣말을 했다. 두 번쯤 숨을 돌리고 난 후 자기도 모르게 "그래, 박제는 아니지"하고 작게 혼잣말을 했다. 가려달라고 말한 게 하나도 후회되지 않았다. 때가 되어 세상을 떠난다면 사라지는 게 옳다. 어쩐지 감은 자기 목소리가 망설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시 한번 "그게 옳다" 선언하듯 소리 내어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때로 감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잘못 든 길이라 분명히 되돌아오게 될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느끼곤 했다. 그럼에도 열에 한 번 있는 성공하는 모험이 주는 만족을 오랜 시간 포기하지 못했다. 늦었다면 늦은 포기였지만 더 늦기 전에 그만두기 잘했다고 믿었다. 신중한 목소리는 통화 마지막에 망설이던 감의 목소리를 알아차렸을까. 감이 확신에 찬 목소리나 신중한 목소리로 기억하고 기록하듯 망설이던 목소리로 기억하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좋았다. 잘못짚었으면 돌아가야 한다. 그 앞에는 출구가 없다.


2025. 07. 29. 13:15-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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