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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번째 출구

저절로 되는 건 없다

by 가가책방

흐르는 모든 것은 의지를 품고 있다.

감은 노트에 메모를 적고는 밑줄을 그었다. 뭔가 멋진 말을 떠올린 기분이라 제법 흥분됐다. 흐르듯이 흐물흐물한 글씨도 운치 있어 보였다. 다시 또박또박 적어두지 않는다면 한 달이나 두 달 뒤에는 뭐라고 쓴 건지 해석해야 할 지경이어도 괜찮았다. 흐르는 건 의지를 품기 마련이기에 의지만 남아있다면 흐르는 듯 적은 글자도 못 읽을 리 없다는 생각이었다.

현실은 조금 달랐다. 문득 떠오른 정말 괜찮은 생각을 휘갈기듯 적었다가 깜빡 잊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뭐라고 썼는지 해석하지 못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간신히 읽을 수 있는 몇 글자를 기준으로 삼아도 맥락이 보이지 않았다. 맥락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꿈을 기록하겠다고 머리맡에 종이와 연필을 두고 자곤 했다. 굉장한 꿈을 꿨는데 얘기를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기억에서 사라지는 경험을 몇 번 한 뒤였다. 눈 뜨자마자 떠오르는 단어를 빠짐없이 기록할 계획이었다. 가장 난감했던 건 눈을 떴는데 아직 한밤 중일 때였다. 불을 켤 수도 없어서 캄캄한데 어떻게 더듬어서 희게 보이는 종이와 연필을 찾아도 글자가 어떻게 써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밝을 때 다시 눈을 떠보면 뭔가를 적기는 했는데 글자가 겹치거나 줄이 겹칠 때가 많아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겹치지 않은 글자조차 자음과 모음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어서 모르기는 마찬가지. 어쩌다 읽을 수 있게 적은 꿈은 찬찬히 읽어보면 밋밋했다.

"난 꿈을 컬러로 꿔."

떠오르지 않는 꿈 대신에 꿈을 컬러로 꾸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천재라는 말에 혹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꿈을 꾸는지 묻고, 꿈이 흑백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난 컬러로 꾸는데."하고 다녔다. 가끔 부러워하는 친구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관심 없었고 몇몇은 미친 사람을 보듯 고개를 저었다. 감은 어린 자신을 만나면 꿈이 뭐라고 내용도 기억 못 하면서 컬러 꿈을 자랑하고 다녔는지 묻고 싶었다. 물론 그럴 수 없는 걸 알았다. 다만 알아볼 수 없는 메모를 마주할 때마다 그때로 돌아가서 메모를 휘갈기는 자신을 멱살 잡고 끌고 오고 싶어지는 마음과 맥락이 같았다. 머릿속 생각이나 무의식을 받아 적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한 줄조차 쓰기 힘들어하는 지금 모습은 다시없을 거고 어쩌면 대작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꿈꿨다. 깨어나 있으면서 꿈을 꾸면 백일몽이라고 한다는데, 감은 스스로 꿈을 잘 꾸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매일 꿈을 꾸고 있었다.

의지를 품은 흐르는 것을 생각할 때 감은 땀을 떠올렸다. 무더운 여름이면 단지 햇볕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흐르는 땀을 말이다. 무더위에 흐르는 땀은 마치 의지가 없어 보인다. 감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라고 해도 그건 의지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더운 여름에 땀마저 흐르지 않는다면 사람의 몸은 더위로 탈이 난다. 기계로 치면 과열되어 회로가 타버리는 상태다. 땀샘 시스템이 몸을 살리기 위해 땀이 불쾌하고 불편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존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다. 쾌적하고 싶은 의지와 무관하게 조금이라도 더 큰 의지가 조금이라도 작은 의지를 이기며 나아가는 게 삶이었다.

감은 땀을 흘린다면 흠뻑 흘리는 게 차라리 좋았다. 물에 옷이나 머리가 조금만 젖는 건 싫어도 풍덩 빠져서 헤엄치면 괜찮은 것과 같았다. 적당히가 없었다. 나갈 거면 흠뻑 젖도록 움직이거나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거나 하는 식이었다. '적당히 잘 살면 되지'하는 태평한 말과는 정반대였다. 못 살거나 잘못 지내는 것도 감의 의지인 셈이었다. 적당히 타협하기 싫어하는 고집이나, 적당히 넘어가지 못하는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다 그랬다. 운명론자의 결론 같지만 감은 자신이 쳐놓은 의지의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가끔은 내버려 두어야 하는 일에도 일일이 간섭했다. 저절로 되는 건 없다는 식이었다. 뭐든 자기가 나서지 않으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오만도 한몫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알아서 잘하겠지'하며 지켜보던 마음이 아이를 돌보거나 가르칠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란 걸 알게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세상을 믿지 않기에 자기 자신도 믿지 않겠다는 어린 마음. 저절로 자라는 마음은 없었다. 자기를 뛰어넘는 의지. 감에게는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다. 다정함이 필요했다.


2025. 08. 09. 23:11-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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