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화를 내는 건 어때
언제부턴가 감은 규칙적인 사람이 됐다. 주기며 잠들고 깨는 시간이 일정했다. 일정함은 이내 익숙함이 되고 편안한 마음으로 이어졌다. 감은 자신이 대단히 보수적인 편이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가장 큰 이유로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을 꼽았다. 웬만큼 힘들거나 어지간히 좋은 조건으로는 변화를 택하지 않았다. 손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머물고 확실한 이익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는 바보 같다고 하고, 누군가는 게으르다며 수군거려도 듣지 않았다. 변화는 최소한에 그칠 것. 미래는 상상하지 않는 편이었다.
공간 운영을 시작하기 전까지 감은 평일에 돌아오는 공휴일마다 엉거주춤했다. 매일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지 않을 때는 오히려 나은 편이었다. 휴관일이 아닌 날마다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세상에 책은 너무 많았고 작은 도서관에 있는 책도 다 읽을 수 없을 거였다. 한 번은 어떤 책인가에서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 빌게이츠가 어린 시절에 이미 동네 도서관 장서를 모두 읽었다는 내용을 발견했다. 의심스러웠다. 작은 도서관이라 해도 새책은 끊임없이 들어올 텐데 분야와 상관없이 모두 읽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빌게이츠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다 읽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감은 동네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은 자신을 상상해보려고 했다. 실패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꿈에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감이 작은 도시로 옮겨온 건 삼 년을 견딘 회사를 그만둔 지 사 개월 후였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쉽게 그만둘 수 없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라 혼자 도망칠 수 없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조건이 마음을 갉아먹는 줄 알면서도 앙상해져서 너덜거릴 때까지 참고 또 참았다. 살면서 처음으로 정신과를 갔다. 수십 문제나 되는 검사지를 풀라고 줬다. 문제를 다 풀어서 냈더니 일주일 후에 오라고 했다. 다 해서 사 만원쯤 들었다. 일주일 후 의사는 결과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너무 예민하시네요."
무던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게 좋다고 했다. 약을 처방해 주겠다며 먹으라고 했다. 감은 싫다고 했다. 약도 이후의 진료도 거절하고 정신과를 나왔다. 이겨낼 수 있어야 했다. 이겨내야 했다. 그게 자기였다. 그래야 자기였다. 감은 화가 났다. 다만 자신의 소신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일반적인 처방을 하는 의사에게 화가 난 건지 가끔은 스스로도 답답하게 느껴지는 자신에게 화가 난 건지 알지 못했다. 감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인정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삶에서조차 주인공이 아닐 수 있다는 상상을 떠올리고 말았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화낼 일이 아니었다. 화날 일도 아니었다.'
감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자신에게 가장 화가 났다. 감이 회사를 그만둔 이유였다.
달콤한 인내는 드물었다. 인내는 불씨 같았고, 불은 자기도 타인도 세계마저 다치게 했다.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낫다는 걸 그만두고서야 알았다. 배우는 게 느린 감의 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