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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번째 출구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by 가가책방

어떤 말들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들은 얘기인지 읽은 글인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말들이 어느 순간에 문득 떠오르곤 했다. 초록이 좋아진다는 건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라는 말도 그중 하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의 진위 여부보다 떠올린 날의 마음이 중요해졌다. 우연히 초록이 눈에 들어왔을 때 문득 '초록이 좋아진다는 건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라던데'하고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나 휴식이 필요한가 봐'하고 되뇌는 식이었다.

작은 도시에 살아도 그런 날은 찾아왔다. 유난히 초록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날이. 다른 게 있다면 초록을 보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거였다. 큰 도시에서 멀어지니 초록에 가까워졌다. 멀어질수록 가까워졌다.

우주에서 본 지구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구름도 바다도 땅도 보이던 지구가 멀어지면서 파란 점이 되는 사진이었다. 우주에서 보면 하찮을지 모르는 지구의 사진을 보며 감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오래 괴롭혀 왔던 자신과 연락이 뜸해진 지 오래인 가족과 거의 없는 친구들이 떠오르는 거였다. 지구가 하찮아 보일만큼 거대한 세계에서 이토록 가깝고도 오랜 시간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니. 창백한 푸른 점처럼 보일 우주 속 지구보다 아득한 기분이었다.

분이나 초를 다투지 않아도 되는 삶이 마음에 들었다. 운전이 편해졌다. 어느 아침 멀리서 신호가 바뀌는 걸 보고 천천히 가까워질 때였다. 가장 앞서 가는 차가 주황신호에 지나갈 듯하다가 엉거주춤 멈춰 섰다. 그 뒤를 가까이 따라가던 차는 꼬리가 들썩일 만큼 급하게 차를 세웠다. 앞차가 가면 뒤차도 꼬리를 물고 따라갈 셈이었나 보다. 뒤차는 경적을 울렸다. 앞차는 못 들은 체 했다. 멀리서 보니 이 신경전이 이해되면서도 하찮았다. 감은 뒤차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주황불을 보고 멈출 수 있으면 멈추는 게 당연하다. 안전을 위해 앞차와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번 신호에 못 가도 2분 정도 후에는 출발할 수 있는 신호가 길지 않은 교차로라는 것도 알만했다. 너무 가까워서 신호가 안 보였는지도 모른다. 약속에 늦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시에 떠나는 기차를 예매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번 신호에 꼭 지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래 왔어서.

감은 자신으로 돌아왔다.

일상이 하찮던 때조차 삶은 소중했다. 멀리 이루고 싶은 목표나 계획이 없어서 지금이 더 간절했다. 새치기며 무단횡단이 싫었던 건 위험해 보여서가 아니라 나에게 올 기회를 빼앗아갈까 봐였는지도 몰랐다. 세계는 적이고 나 홀로 맞서야 하는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고, 규칙에 연연하고,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야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삶이 소중할수록 일상에 가까워질수록 웃음에서 멀어졌다. 늘 웃는 사람들을 보며 무슨 웃을 일이 그렇게 많은가 이상하게 생각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행복해진다'같은 말은 억지요 사기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이는 건 남을 속이는 것만큼이나 나쁜 거라고 믿었다. 거짓말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진실해야 했다.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 법 앞에 사실을 고해야 했다. 그럴 수 없다면 괴로워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죄를 짓고도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찬다면 세상도 삶도 엉망진창이 될 거였다.

감은 자신과 세계를 지키고 싶었다. 가까이에서 일상을 해치는 모든 것과 맞서고 싶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마음을 써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쉬지 않고 움직여도 표시가 나지 않았다. 감은 지쳤다. 화가 나서 온 마음이 불타는 것 같았다. 도망치듯 작은 도시로 떠난 여행에서 오랜만에 초록으로 가득한 풍경을 마주했다. 초록이 눈에 들어와서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초록이 좋아진다는 건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감은 세계가 아닌 자신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지키려 하기보다 자기를 돌봤다. 세계는 적이 아니었다. 세계를 적으로 보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두면 해치고 빼앗고 시비 걸고 다투려 드는 세계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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