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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번째 출구

그리고, 다정함이 남았다

by 가가책방

감은 큰 도시가 그립지 않았다. 자의나 타의로 매일 사람들과 어울리고 주말에도 쉬지 않던 친목 모임이 모두 끊어졌어도 괜찮았다. 거품이 꺼지듯 빠르게 멀어졌다. 일상이 담백해졌다. 사람이 힘들지 않았다. 연락처에서 누군지 모르는 이름들을 지웠다.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이름마저 지웠다. 그리고 다정함이 남았다. 누군가는 소중함은 잃어버린 후에 깨닫는다고 했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열 중에 아홉은 지우고 남은 이름들이 보기 좋았다. 일 없이 전화해도 좋을 날을 헤아려보고 웬일이냐며 무덤덤하게 들려올 목소리를 흉내 내며 혼자 웃었다.

아버지는 벨 두 번만에 전화를 받으며 조금은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웬일이야'했다. 숨소리를 들어보면 일하는 중이었을 텐데 벨 두 번만에 받은 걸 보면 놀란 게 분명했다. 어쩌면 걱정이었을지 몰랐다. '그냥 잘 지내시나 안부 전화 했어요'하는 말에, '그래'하고 소리는 끊기고 숨소리만 들린다. '별일 없으시죠?' 묻는 감에게 '바빠 죽겠다'하고 또 말이 없다. 감은 '얼른 일 하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 말하고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렸다. '그래, 너도 잘 지내라'하는 대답 다음에 숨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전화가 끊겼다. 전화가 끊기기 전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숨소리였다. 벨소리 두 번만에 전화를 받고도 별말이 없는 아버지. 그게 아버지의 다정함이었다. 아버지는 숨소리가 다정했다.

어머니는 벨소리가 자동응답으로 바뀔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집에 두고 어디 가신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아버지는 자꾸 전화를 두고 나가서 소식이 없는 어머니에게 화를 냈다. '두고 다닐 거면 뭐 하러 비싼 돈 내면서 전화기를 쓰느냐'며 두런거렸다. 그때는 화가 났나 보다 했다. 아버지의 숨소리를 다정하게 느끼고 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걱정했던 게 아닐까. 시골이란 여전히 눈이 닿지 않는 도랑이며 비탈이 사방에 있고, 더운 날이나 궂은날에도 밤이나 새벽까지 일하는 사람이 어머니였으므로. 혹시라도 실족이라도 한 건 아닌지, 어디 더위 속에 쓰러져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감정 표현에 서툴렀으므로 다른 말을 찾지 못했을 거였다. 새삼 감은 다정함이라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다정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알 수 있을 만큼 오래 들여다본다면, 조금만 더 자주 마음을 열고 보여줄 수 있다면, 다정함은 감과 주변의 작은 세상 정도는 거뜬히 구해낼 수 있을 거였다.

감이 아버지의 다정함과 오해와 갈등에 대한 생각을 마칠 때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동네 여자들끼리 놀러 왔다며 어디라고 낯선 도시 이름을 전했다. 어머니는 긴 세월 동안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천진난만함을 아주 잃어버리지 않았다. 밤새워 일을 하는가 하면 한참이나 남은 일을 두고도 놀러 갈 줄 알았다. 놀고 싶을 때는 놀아야지 하면서도 큰 일이거나 작은 일이거나 일 앞에서 도망치는 일이 없었다. 어머니야말로 여장부였다. 어머니는 '전화했었냐, 여기 어디 놀러 왔다'하고, '별일 없어'하고, '또 통화하자'하고 전화를 끊었다. 감이 모르고 살아온 놀 때는 놀 줄 아는 어머니의 천진난만함이었다.

감은 혼자 생각으로 오랜동안 아버지는 원망하고 어머니는 안쓰러워했다. 아버지는 말이 없고 무뚝뚝하며 어머니는 조용히 순종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다정하지 못했던 마음 때문이었다. 다정함을 느끼고 보니 아버지는 섬세했고 어머니는 강단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펄쩍 뛰겠지만 감은 처음으로 두 사람이 제법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감의 마음이 다정함으로 가득 찼다. 온 세상이 다정했다.


2025. 08. 07. 23:10-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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