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은 무죄를 주장한다
감이 소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잃어버린 감각은 거리감이었다. 큰 도시에서는 흔히 걷던 거리가 문득 멀다고 느껴진 날 감은 자신이 소도시에 어울리는 사람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파트라면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도 5분은 걷는 게 일상이던 나날과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는 걸어서 가는 게 버스를 기다리거나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빠르던 기억이 아득히 멀어졌다. 오백 미터만 떨어져 있어도 멀다고 하고 일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감의 소도시는 원도심 끝에서 끝까지 거리를 재도 이쩜 오 킬로미터에 못 미쳤기에 도시 절반 가까운 거리를 걸어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말이 됐다. 객관적인 규칙이나 원칙에서는 멀어지고 주관적인 체감과 관습은 스며들었다. 다만 한 가지, 감이 내려놓지 못하는 게 있었다. 원칙을 거스른 습관이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장면이 흔했다. 감은 오래전 마음에 담아두었던 맹세를 떠올렸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감은 차라리 자신이 두 배 더 불편해지더라도 남에게 하나의 불편도 끼치지 않는 게 옳다고 믿었다. 필요하면 믿음을 근거로 다퉜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을 붉혔다. 마음이 조금도 풀리지 않아도, 오히려 기분이 상하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맞섰다. 미련하기도 한 고집이었다. 정의 같은 거창한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큰길에서 작은 길로 우회전했을 때 감은 기묘한 대치 상황을 목격했다. 차 두 대가 서로를 향해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한 대는 일방통행로를 역주행해서 나오는 중이었고 다른 한 대는 역주행 방향으로 차선을 타고 달리다 좌회전하려는 차였다. 우회전하려는 차와 좌회전하는 차로 방향은 다른데 둘 다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게 닮아있었다. 차 색깔마저 검은색으로 같았다. 차의 종류마저 같았다면 차종에 편견이 생길만한 상황이었다. 똑같은 놈 둘이 싸우고 있었다. 괜히 나중에 진입한 감마저 휘말리게 하면서 좁은 골목에 긴 경적이 으르렁 거렸다. 하나라도 먼저 비상등이라도 켜고 양보하면 될 텐데 둘 다 그럴 마음이 없다. 경적은 길어지고 사람들이 하나 둘 나와서 쳐다보기 시작했다. 저러다 서로 아는 사람이면 곤란할 텐데. 두 사람만 건너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도시가 겁나지 않는 사람들. 자기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맞서는 사람들. 잘못을 인정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사람들. 잠재적 가해자들. 남에게 해로운 사람들. 해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자신만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책임은 어디에 있을까.
감은 기다렸다. 여러 차례 고개를 저었을 뿐 뒤에서 여러 차례 울려도 가만히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은 자처하지 않는 게 현명했다. 책임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사람은 바보가 된다. 많은 다툼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기는 일과 비슷한 원리였다.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건 충분히 증명을 거친 진리.
진리라니. 감은 왠지 웃음이 났다. 커피가 간절했다. 오늘은 샷을 추가해서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도로에 주차되어 있던 차 한 대가 움직였다.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어 몰랐던 불법주차였다. 감은 무책임 삼각지대를 빠져나왔다. 어쩌다 저런 상황이 일어났을까 감은 되짚어 봤다.
차 한 대가 도로 한쪽에 멈춰 선다. 밥을 먹으러 가는지, 차를 마시러 가는지, 세탁물을 찾으러 가는지, 아니면 다른 무슨 용무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얼마나 나중인지 모르지만 주차되어 있는 차를 피해 역주행 방향으로 차가 달린다. 불운하게도 바로 그때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으로 우회전하려는 차와 부딪힐 뻔하며 멈춰 선다. 서로 놀란다. 놀람은 오래가지 않고 금세 화가 난다. 서로를 탓하며 경적을 울리기 시작한다. 경적 소리를 듣고 차를 세워둔 사람이 밖으로 나온다. 다툼의 틈새에 조용히 빠져나간다. 밀려있던 차들이 주차된 차가 빠져나간 길로 지나간다. 서로 역주행하다 부딪힐 뻔한 두 사람은 여전히 화를 내고 있다. 자, 누구 책임이 제일 큰가. 무책임한 건 누구인가. 커피가 쓰다. 입맛이 쓴지도.
2025. 08. 05. 23:21-08. 06. 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