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검사로 부산에서 근무할 때 오랜 시간에 걸쳐, 때로는 버겁게, 때로는 뜻밖의 공감 속에서 읽은 책이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다.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는 몇 장 읽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해 겨울, 부산 해운대 관사에서 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주인공 플로렌티노 아리사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세상에 보기 드는 사랑을 한 남자에 대한 감동(평생을 한 여인을 사랑했다는 점에서)이나 부러움(결국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는 점에서)의 문제라기보다, 내가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조 또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감히 판단할 자격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어린 시절의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한 채 그리워하다가, 늙어서 그 대상을 다시 만나 결국 사랑을 이룬다는 이야기. 이 서사를 마주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단순했다.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일까?
시간은 모든 것을 바꾸고, 사람은 그 시간을 견디며 변한다. 사랑의 대상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사랑해 온 것일까. 한 사람인가, 한 시절인가, 아니면 기억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어떤 형상인가.
플로렌티노의 사랑을 흔히 '한결같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인간은 끝까지 한결같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사랑은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며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은 희미해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며, 때로는 스스로를 속이는 방식으로 모양을 바꾸어 살아남았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그 대상을 사랑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순수한 헌신이기보다는, 어쩌면 그의 연인이었던 페르미나 다사가 없는 부재의 시간을 견디는 한 인간의 집요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마르케스는 왜 이렇게까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 이야기를 끝까지 밀어붙였을까. 소설이니까 가능한 이야기라고 치부해버리고 말기에는, 그 집요함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은 후 10여 년이 지난 이제야, 나는 이 소설이 사랑의 이상을 말하기보다는, 시간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기억은 나쁜 것을 지우고 좋은 것만을 과장하며, 그 덕분에 우리는 과거의 무게를 견디고 현재를 살아간다. 플로렌티노의 사랑 역시 그렇지 않았을까. 그것은 한 여인을 향한 사랑인 동시에,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 소설은 더 이상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누구나 저마다 끝내 놓지 못한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지나간 시간, 돌아갈 수 없는 순간, 이미 변해버린 사람.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이라 부르기도 하고, 신념이라 부르기도 하며, 때로는 운명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도저히 이 삶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르케스가 말하고자 했던 무언가는 어쩌면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을 견디는 한 인간의 생존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자, 이젠 나도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뒤에
무엇을 끝까지 붙잡고 살아야 할까.
지난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열정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무엇이라고 칭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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