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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윤채2(가제)]

34화 "아, 그리운 할아버지"

알립니다.

본 글은 저와 개인적으로 '51주 챌린지'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올린 이야기를 당사자의 동의 하에 공유합니다. 실제 발달장애 당사자가 자신의 관점으로
사회이슈와 일상을 여과없이 드러낸 이야기인 만큼 편견없이 봐주시길 권합니다.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이번 명절 때 독자 여러분들은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나셨나요? 저는 2008년에 돌아가셨던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가끔 안방이나 생신 때 가족이나 친척과 함께 모여서 여러 이야기를 하셨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나네요.


오늘은 할아버지와의 추억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1927년 경남 창녕 출신이신 제 할아버지께서는 학창 시절, 동네에서 수재라고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북고등학교와 현재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오셨죠. 의외로 법조인이 아닌 교육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는 무엇인가?’를 접한 후 교육과 사학 쪽으로 눈을 돌리셨다고 합니다. 1952년 4월부터 1960년 7월까지 청도 모계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한 이후부터 오랜 기간 교육자로 살아오셨죠.


그러다 2남 2녀의 네 남매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잠시 삼성그룹에 속했었던 중앙일보에서 인쇄된 신문을 전국 각지로 보내는 부서인 발송부의 부장으로 일하셨었습니다. 언론사를 떠난 후 지금은 ‘순천제일대학교’로 교명이 바뀐 ‘순천공업전문대학’의 학장을 맡으셨으며 둘째 손자인 제가 태어날 당시에는 서울 양천고등학교 제3대 교장으로 계셨었죠.


보시다시피 저희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안경을 오랫동안 쓴 부분과 이마가 넓었던 것이 생각나네요.



아마 중학생 때였을 겁니다. 당시 부모님께서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일부 닮았다고도 하시고, 제 행동을 보며 할아버지께서 저를 귀엽게 여기셨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들을 되돌아보니, 세 가지 정도 기억납니다.



첫째로, 이야기를 비교적 길게 하셨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와 관련한 두 가지 짧은 일화가 있는데요.

1. 2000년 가을의 어느 일요일이었을 겁니다. 작은외삼촌의 결혼식 날이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주례를 맡으셨습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덕담을 하셨던 것이 생각나는데요. 좋고 유익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았으나 제가 어렸을 때라 덕담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요.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니 지겨워서 ‘언제쯤 이야기가 끝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2. 중학생이 된 무렵.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할아버지를 뵈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밤으로 기억하는데요. 할아버지는 안방에 가족들을 불러놓고 조상들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30분 넘게 하셨었죠. 특히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청백리 이야기와 조선 단종과 세조 시대의 사육신 이야기 등을 들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두 번째로, '책장'에 대한 추억이 있네요. 할아버지 네에서 시간을 보낼 때 책장에 비치되어 있던 여러 사진 앨범들을 비롯하여 10년도 더 넘은 월간지 등 볼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책장을 자세히 볼 일이 있었는데, 기업이나 단체에서 받은 수첩들이 종류별로 다양했습니다. 적혀 있는 내용을 보니 한자뿐 아니라 메모도 많이 하셨더라고요. 할아버지께서는 교양 및 한문에도 관심이 많으셨음을 간접적으로 알 게 되었습니다.


출처: 경향신문

세 번째로, 인생의 후반부에도 의욕을 보이셨던 것이 생각나네요. 2006년 초에 할아버지께서 당시 문화재청에서 주관하는 <궁·능 관람안내 지도위원>에 응시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자격요건은 70대 이상의 노인이 대상이었으며 하루 1만 보 이상 걸을 수 있어야 가능했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10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을 뚫고, 최고령자로 당당하게 선발되었죠. 할아버지가 덕수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관광객 안내 업무를 하고 있으셔서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할아버지께서 30년이 넘도록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하루 4시간을 걸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보니 할아버지의 생신을 매번 음력으로 지냈었는데요. 주로 국립의료원 안에 있었던 <스칸디나비아클럽>의 접객실에서 친척끼리 모여서 축하했었네요. 마찬가지로 관련하여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청주 본가와 비교적 가까운 한정식집에서 할아버지의 마지막 생신을 보냈었는데요. 한정식 코스요리를 먹다 우연히 본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1년 전만 하더라도 매일 만 보 이상 걸으며 관광객들을 안내하셨었는데 전보다 기운이 없어 보이시더라고요. ‘몸이 안 좋아지신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우려는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듬해 봄, 할아버지께서 중환자실에 입원하실 정도로 건강이 많이 나빠지시게 된겁니다. 그리고는 며칠 후 거실에서 전화를 받았는데요. 이른 아침에 임종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급히 국립의료원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5일 장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면서 할아버지가 곁에 계시지 않는 다는 생각에 참담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입관할 때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한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였을 겁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여러 가지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할아버지가 생각난 것도 있었고요. 할아버지가 걸어오신 여정을 통하여 깨달음 및 지혜를 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나머지, 그 흔적들을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작년 5월이었을 겁니다. 한동안 방문하지 못했었던 창녕의 할아버지의 산소에 방문하려고 갔는데요. 그사이 잡초도 많이 자랐고, 길이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아 안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약 20년 만에 오촌 관계의 친척을 뵈었네요.


그러다 8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다니던 직장의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①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2023년 5월부터 다시 심해져서 회사 생활을 더 진행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음.
② 임금 부분은 대체로 만족했으나 종합적인 삶의 질은 만족스럽지 못했음.
    일 특성상 주말 출근이 많았으며 오후 9시 30분 이후 귀가하는 일이 많다 보니 여러 부작용도 있었음.
③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퇴사한 부분도 있음.


또, 할아버지의 흔적을 살펴보며 앞으로 할 일들의 추진력을 얻기 위하여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순천제일대학교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① 2023년 8월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강사’ 교육생으로 선발되어 11월 교육을 앞두고 있었음.
② 학업을 잇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며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대학원 석사과정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음.


그렇게 며칠 후, 할아버지께서 1985년 8월부터 1988년 3월까지 3대 학장으로 계셨었던 학교인 <순천제일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행정실에 먼저 방문했습니다. 3대 학장님의 손자인데, 제 할아버지의 흔적들이 있는지 여쭤봤었죠. 

이미 30년 이상 지나서 자료가 많지 않아도 일부는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기다려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행정실뿐 아니라 도서관 측에서도 도와주셔서 어렵게나마 할아버지께서 학장으로 계실 때의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의 보존서고에 있었던 1988년 2월 졸업앨범에서 확인할 수 있었죠.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았을 때 정말 반가웠고, 사진을 보는 순간 한동안 눈물을 멈추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흔적들을 보면서 든 생각은 ‘직장 내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 전문 강사 자격 취득 외 대학원 진학과 같은 일들이 순조롭게 잘 되었으면 좋겠다'였습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도 이겨내어 다시 웃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마음도 덧붙여서요. 퇴사 후에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했습니다.




돌아가신 지도 16년이 넘었습니다. 지금 살아계셨더라면 다 큰 어른으로 성장한 제 모습을 보고 기뻐하셨을테죠. 

할아버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더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할아버지의 흔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신 순천제일대학교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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