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어릴 적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지갑에서 내 돈으로 무언가를 사서 건네는 데 그게 왜 기쁠 수 있다는 건지. 선물을 받는 건 나에게 무언가 하나가 생긴다는 것이지만, 선물을 하기 위해선 금전적 손실뿐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한다. 나도 선물하는 행위를 좋아는 했지만, 그게 선물을 받는 것보다 더 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애써 당사자를 생각하고 고심 끝에 고른 선물에 대한 미적지근한 반응에 대해 실망하는 내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다.
뭔가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내가 예상했던 반응에 미치지 못할 때 괜한 섭섭함을 느끼는 내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이럴 거면 왜 선물을 했을까. 생색을 낼 수도 없고, 그러려고 한 선물도 아니었지만 내 예상을 빗나간 반응으로 하여금 나는 점점 쪼잔해졌다. 차라리 안 주고, 안 받겠다는 생각이 점점 자리했다.
"곧 크리스마스 돌아오는데 애들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걱정이야."
이모는 초등학생 자녀 2명과 고등학생 자녀를 두고 있다. 아직은 미성년자인 아이들이기에 크리스마스 시즌만 다가오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제 마냥 어린이가 아니니까 외식으로 때울까 싶다가도 여전히 고민은 이어진다. 집안에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참 많다는 걸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
사촌 동생들과 나이차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딱히 용돈이나 선물을 챙기지는 않았기에 이모와 엄마의 고민을 보면서 그저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어차피 선물을 주는 것이 산타가 아니라 부모님이라는 것을 다 알만한 나이일 텐데...
예전의 나는 상대를 생각하며 선물을 고르는 시간을 기꺼이 여겼지만 어느 순간 생일도, 기념일도 형식적으로 여기고 그저 마음만 전하게 되었다. 뭘 사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냥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 물어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고 합리적이라 생각하며 지냈다. 나이를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라 합리화했다.
좋은 선물은 상대를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에서 빚어진다.
상대를 생각지 않는 선물은 그저 품앗이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번에 쟤가 이거 선물해 줬으니까 비슷한 금액대로 이거 주면 괜찮겠지? 민망하지만 20대 후반부터는 선물할 때 마음을 담지 않고 형식적인 절차처럼 행했다. 상대가 나에게 준 선물이 무엇인지, 금액대가 얼마인지. 그 금액과 얼추 비슷한 수준으로 맞춰서 선물을 보냈다. 물론 정 없이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비싼 선물을 보내주지는 않을 거야!'라는 생각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 사람과 비슷한 금액대를 선물해야 상대도 부담감을 느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누군가는 핑계라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랬다. 적정선이 존재해야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가 편했다.
부모는 자녀의 머리맡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놓아둔다. 그 선물의 공로는 산타할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아이는 선물의 출처가 당연히 산타할아버지인 줄 알고 그 감사한 마음을 선물을 보낸 이가 아닌 산타할아버지에게로 돌린다. 그런다고 하여 부모가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준 선물인데, 하며 꽁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의심하지 못하면 그저 좋아한다. 행복하게 웃는 모습에 만족하고 덩달아 행복해한다.
선을 뭉개고 넘나드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그 선을 쉽게 넘는다. 애초에 선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선물을 받고 행복해하는 얼굴은 선물을 준 이에게 선물이 되어 돌아온다.
생일선물조차 품앗이가 되어버린 요즘, 크리스마스 선물은 가장 순수한 마음을 담은 선물인지도 모른다.